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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좋고 물 맑은 경남 산청의 산골에서 2남 5녀 중 셋째로 자랐습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깊은 사랑 속에 큰 어려움 없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것이라도 이웃과 나누었으며, 관계를 소중하게 여겨 주변에 늘 사람이 많았습니다. 자식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기에, 저는 자유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남편은 삼대가 함께 사는 시골 보수적인 집안의 장손이었습니다. 남편 직장이 있는 부산에서 맞벌이하며 삶의 터를 잡았습니다. 잦은 제사와 경조사로 빈번하게 시댁을 오갔고 농사일로 바빠 제쳐놓은 시댁의 온갖 일들은 모두 제 몫이었습니다. 무뚝뚝하고 책임감이 강한 남편은 집안 대소사에 헌신적이었지만, 힘들어하는 저에 대한 배려는 없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은 서로 왕래가 잦아 우리 집에 자주 왔습니다. 일주일 넘게 머물기도 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신혼 초, 미닫이가 있는 단칸방에서 사촌 시동생과 친정 동생도 함께 살았습니다. 퇴근 후, 장 봐서 저녁을 준비하고, 밤늦게까지 해야 하는 집안일로 몸은 늘 녹초가 되었습니다. 결국, 병을 얻어 휴직했고, 치료하는 동안에도 몸이 불편한 시할머니를 잠깐 모셨습니다. 성심을 다해 모셨더니 시댁 마을에서 저에 대한 평판이 좋아졌습니다.
결혼 삼 년 만에 효자 남편의 책임감을 함께 진 스트레스 때문인지 반신불수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병원을 오가며 힘들게 집중 치료를 받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힘들어해도 남편은 한 마디 위로의 말이 없었습니다. 마음 깊이 원망과 섭섭함이 오래도록 자리 잡았습니다.
육고기 분류작업과 판매일을 오랫동안 한 경험을 살려 제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장사가 잘되어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수입이 느는 만큼 바빠졌고 일도 많아졌습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힘에 부쳤는지 다시 병이 났습니다. 50대에 류마티스 관절염이 왔습니다. 통증으로 잠을 푹 잘 수 없었습니다. 뼈도 약해져, 발목 수술에다 고관절 인공뼈 삽입 수술도 받았습니다. 게다가 목뼈까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반신 마비가 될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가 무서웠습니다.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제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원망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아무리 고생해도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야속하고 미웠습니다. 수술을 목전에 두고 병실에서 대성통곡했습니다. 간호사들이 놀라서 달려와 저를 달래며 안심시키려 애썼습니다.
회복을 위해 무조건 쉬어야 했습니다. 동동거리며 힘들게 살아온 지난날들을 돌아봤습니다. 세 번의 수술로 인공 뼈가 여러 개 박힌 골병든 몸이 보였습니다. 수술로 인한 후유증이 심할 때마다 ‘이리 살다가는 일만 하다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리 살 수밖에 없을까? 내 살길은 내가 찾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때, 우연히 정토회 홍보물을 봤습니다. 그날 바로 동래법당을 찾아갔습니다. 불교를 알고 싶어 왔다는 제게 '수행법회에 참석해 보라' 권하길래, 6주간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불법에 푹 빠졌습니다. 2019년 1월 정토회를 알고 그해 3월 불교대학에 바로 입학했습니다. 살길을 찾아야겠다는 간절한 희망이 저를 운명처럼 정토회로 이끌었나 봅니다.
남편은 정토회가 사이비라며 반대했습니다. 아르바이트 간다며 거짓말하고 몰래 다녔습니다. 하지 말라 하니 더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고모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때 인도성지순례 신청을 해 놓은 상태라 남편에게 정토회에 다니고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남편은 펄쩍 뛰었지만 저는 인도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순례 후 집에 오니 화가 난 남편은 집에 발도 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개를 팍 숙였습니다! 정토회 일 말고는 뭐든 남편에게 맞추었습니다.
바쁘게 사느라 불교에 관심이 없었고 절에 갈 시간도 없었습니다. 제게 불교란 초파일과 동짓날, 비빔밥이나 동지팥죽 얻어먹는 곳이 절이고 불교였습니다. 저는 불상이 부처님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때까지도 부처님이 사람으로 나투신 분인 걸 몰랐습니다.
법회에 참석해 법문 들으며 몰랐던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함께 배우는 도반들이 좋고, 친절한 정토회 사람들이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서툴고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조금씩 알아갈수록, 배울수록 놀라웠습니다.
불교대학 입학 후 바로 천일결사1에 입재했습니다. 새벽 5시 일어나는 것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이 힘든 걸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습니다. 입재 때의 다짐이 생각났습니다. `매일 눈 떠 살아있다는 것, 그것에 감사 기도하자.’ 하루도 빠짐없이 제시간에 일어나 제게 주어진 소중한 하루에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정토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꼭 참여했고,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선선히 했습니다.
불교대학 돕는이 소임을 맡았습니다. 저는 컴맹입니다. 아무것도 몰라서 노트북을 사 들고, 돕는이 업무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귀찮아하지 않고 언제든 가르쳐주는 도반들이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전화만 하면 법당이나 카페에서 만나 가르쳐주었습니다. 고마운 도반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의 밝은 미소와 친절, 배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정토회는 안 되는 것은 되게 하는 비법을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못하고 안 되는 것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을 만들어 함께 갈 수 있게 합니다. 지금 저는 과거에 못 했던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로 회의를 하고, 경전대학 수업도 진행합니다. 잘 모르는 도반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선배 도반들이 제게 했듯이 천천히 가르쳐줍니다. 작은 것 하나 알려주어도 감사해할 때 제가 더 행복합니다. 정토회를 만난 제 인생에 마법 같은 일들이 계속 일어났고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자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제 아들, 딸은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습니다. 특히 아들은 제가 아프고 힘들 때마다 옆을 지키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아들 말 한마디면 마음이 싹 풀렸습니다. 정토회 가는 걸 남편이 반대했을 때도 아들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역사 공부하고 가라며 책을 사주었습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의리가 있어 친구도 많았습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자기 관리를 잘했으며 주말이나 휴가 때 등산을 자주 가곤 했습니다.
제가 불교대학 돕는이 소임을 처음 맡았을 때, 아들이 설악산 등산 갔다가 사고로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아들의 사고 소식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뉴스에나 나오는 남의 일인 줄만 알았습니다. 이 세상 어떤 일도 자식 잃은 슬픔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 심정이 이해되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무엇을 해도 마음이 잡히지 않을 때, 금강경이나 지장경 전체를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습니다. 제가 슬퍼한다고 아들이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들 보내고 일주일 뒤, 불교대학 돕는이 소임을 계속했습니다. 스님 법문을 만나지 않았으면 드러누워 못 일어났을 것입니다. 불법 만난 덕분에 이렇게 세상으로 나와 꾸준히 법문 듣고 관점을 바로 잡으며 살아있습니다.
어려움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법문이라도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시련을 많이 겪거나 힘든 일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법문은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제는 법문을 들을 때 전과 다르게 머리에 쏙쏙 들어와 가슴까지 와닿습니다. 큰일을 겪고 나니 웬만한 일은 별일 아니었습니다. ‘저 사람보다 잘해야지’ 하는 경쟁심도 있었는데 ‘잘하면 뭐 하고, 못 하면 뭐 하겠노! 편안하면 되지!’ 합니다. 불법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직 저 자신을 알지 못한 채, 남편과 시댁 원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상대를 저에게 맞추려 하지 않고 '그 사람은 그렇구나'하고 다름을 인정하니 한결 편안합니다.
삶의 어느 순간 부처님 안에서 ‘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로 받았고, 힘들면 쉬엄쉬엄 가라며 운명처럼 제 발걸음을 돌려놓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을 치유 받고 저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남편은 압니다. 수술 후 불법 만나 제 인생에 ‘다시 봄’이 왔음을! 제가 변했듯 남편도 많이 변했습니다. ‘집안일은 당연히 여자가 해야지’에서 ‘나눠서 한다.’로 바뀌었습니다. 남편은 청소기를 돌리고, 가끔 아침밥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어리석게도 '내가 없는 내 인생'을 오래 살았습니다. 불법 만나 제 삶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고집만 내세우고, 상대방으로부터 늘 상처 입던 저는, 이제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단단히 단련된 맷집이 웬만한 자극에는 끄떡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라는 게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없습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습니다. 이제 저는 아무런 바람이 없습니다.” 보경 님의 담백한 이 말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소용돌이 같은 삶을 잔잔히 잠재우고 넉넉하게 봉사하는 김보경 님, 전해준 맑은 울림 정말 고맙습니다.
글_안화순 희망리포터(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천일결사 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만일)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천일)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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