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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우리 집은 아버지가 술을 드시면 어머니와 다툼이 잦았고, 가구를 부수기도 했습니다. 주말 아침 TV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 집 빼고 다른 집들은 다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다음에 커서 우리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빠가 되어 줄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원래 기질도 예민한 데다, 셋째를 임신하면서 제가 너무 예민해졌습니다. 남편은 제 핸드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꿔주며, “이거 한번 들어봐. 스님이 말씀하시는 건데 되게 재밌다”라며 즉문즉설 팟캐스트를 알려줬습니다.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자였던 저는 “나는 스님 말씀은 안 듣는다” 하며 듣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별말 없이 제가 차를 탈 때마다 본인이 들었던 재미있는 스님의 팟캐스트를 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같이 듣던 중 남편 때문에 힘들다는 질문자에게 스님이 하신 말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옆집 남자라고 생각하라고? 그러면 옆집 남자인데 돈도 좀 줄 거고, 애를 아무리 안 봐도 자기 아이니까 한 번이라도 안아주기도 하지 않느냐고?'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답변이라 두고두고 생각났습니다. 스님 말씀 그대로 저도 남편을 옆집 아저씨라고 생각하고 살펴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전까지는 나 혼자만 하는 독박 육아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하고 같이 운동도 하고 놀아주는 남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 남편일 때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옆집 아저씨라 생각하니 그 사람은 좋은 아빠였습니다.
결혼 전 제 직업은 어린이와 부모 대상의 웹 사이트 기획자로 당시에는 홈페이지도 만들고 콘텐츠도 만드는 것이 저의 일이었습니다. 부모용 콘텐츠로 육아 관련 칼럼을 찾아 사이트에 올렸었는데, 그때 올린 기사 중에 아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엄마가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어떤 스님의 칼럼이 있었습니다. 아동 발달 단계에서 세 살까지가 중요한 시기인데, 스님은 어떻게 알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스크랩을 하면서 신기했었습니다.
나중에 첫째 아이를 낳고 스님의 기사가 생각나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가 세 살 될 때까지 제가 키웠습니다. 세 살이 지나고 직장을 다시 다니고, 임신하면 그만두기를 반복하며 세 아이 모두 제가 직접 키웠습니다. 후에 정토회에 와서 그 기사가 법륜스님 말씀인 것을 알고 그 인연에 감사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감사한 일입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기만 해도 마음이 많이 편안해져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봉사자를 구하는 광고를 보고 홈페이지 재단장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불교대학도 입학하고 〈깨달음의 장1〉도 다녀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저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밥 주고 잠잘 수 있을 정도로만 챙기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은 수행 정진하며 저의 업식을 잘 닦는 것이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애가 셋인데 어떻게 활동하세요?”라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아이가 셋이라 활동을 안 할 수가 없다. 도반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제 업식을 살피고, 사람들과 관계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 제가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면 저만 미치는 게 아니라, 온 집안이 미친다. 그래서 애들하고 마음 편하게 살려고 봉사하고 활동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생계형 수행자입니다. 마음 편하게 살기 위해서 수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속한 기획홍보팀은 전문 분야로, 각 팀의 담당자들은 현재의 직업이 그 분야이거나 그 분야의 경험이 풍부한 분들입니다. 다른 팀은 3년마다 소임이 바뀌지만, 저의 팀은 전문 분야라 거의 고정적으로 같은 업무를 합니다. 업무에 대해서는 팀장인 저보다 담당자들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은 배우고 봉사자들의 요청을 원활하게 처리하는 게 제 업무라는 마음으로 소임을 시작하였습니다.
소임을 하며 부딪힐 때가 저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업무하는 방식이 저와 다르면 도반의 말을 듣지 않고 무시하는 업식이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너무 창피했습니다. 알아차림보다 듣지 않고 무시하는 마음이 더 빨리 올라왔습니다. 제 마음을 인정하지 못해 도망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 마음은 그림자처럼 따라왔고, 어떤 때는 그 그림자가 앞에 있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 도반에게 “나하고 업무 방법이 다를 때 내가 그렇게 반응한다. 정말 미안하다. 나도 지금 고쳐보려고 하는데 잘 안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하게 저의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그 도반이 보였습니다. 도반은 대중이 뜻을 한 곳에 모을 수 있게 동기 부여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서로 잘하는 것은 지지해주고 부족한 부분은 지원하면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저는 제가 소통과 화합을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활동하면서 알게 된 것이 '앞에 조건이 있었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 조건은 '내가 이해되는 범위에 한해서'였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서는 바늘 끝만큼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억울하다는 한 도반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제 마음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가만히 살펴보니 저도 억울했습니다. ‘내 억울함이 먼저여서 도반의 억울함을 듣지 못했구나. 그러니 이해도 되지 않고, 화합이 어려웠구나. 화합을 못하니 내가 괴롭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떤 사람과도 소통과 화합하는 것이 현재 저의 과제입니다.
팀장으로서의 과제는 효율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팀의 업무가 방대하여 각각의 업무를 우선순위로 나누어 집중하고 서포트하려 합니다. 사람이 바뀌더라도 시스템 안에서 다음 사람이 판단하여 진행이 가능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수행을 우선으로 하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진행하는 것 또한 제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불교대학 졸업 수행담을 쓸 때만 해도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들이 생생했는데,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게 신기합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고, 아버지가 그랬었지’하는 정도입니다. 지금은 아버지하고 같이 밥 먹었고, 뒷산에 약수 뜨러 갔고, 주말에는 카세트 켜놓고 아버지와 동생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며 놀았던 일들이 기억납니다.
실제 제 인생의 많은 부분은 행복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어머니와 싸운 일들은 시간으로 봤을 때는 1~2% 정도였는데, 수행하기 전에는 그 1~2%를 어린 시절의 전부라고 기억하며 아파했습니다. 지금은 '그때 그런 일도 있었지.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구나.' 할 뿐입니다. 이제 제대로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있는 그대로 봐라. 눈 뜨고 봐라.” 하신 말씀이 이런건가 싶습니다.
인터뷰 내내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솔직한 답변에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생계형 수행자’로 하루하루 마음 편하게 살려고 봉사하고 활동한다는 말에 간절함과 절실함이 느껴졌습니다. 엄마 아빠가 행복하여 아이들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 내 억울함이 먼저여서 도반의 억울함을 듣지 못했음을 알아차리고, 소통과 화합을 과제 삼아 꾸준히 나아가는 과정을 읽을 수 있어 잔잔한 감동이었습니다.
글_이재선 희망리포터 (서울제주지부 구로지회)
편집_최미영 (국제지부 아태지회)
깨달음의 장 4박 5일 기간의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평생에 한 번만 참여할 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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