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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회는 2015년 봄 집사람 권유로 수원 법당 불교대학에 입학하면서 인연이 되었습니다. 공부하길 좋아하는 집사람은 3년 앞서 불교대학에 다녔습니다. 집사람은 정토회가 ‘당신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는데, 사실 저를 바꾸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즈음 자녀들과 불화가 있었습니다. 큰아들이 중학생일 때 학원을 안 보내고 제가 직접 가르쳤는데, 알려준 것을 틀리니 답답했고 혼도 많이 냈습니다. 고등학생이 돼서도 계속 부딪쳤습니다. 아들의 행동과 말투가 못마땅하고 불량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둘째 딸은 눈치가 늘어 이리저리 빠져나갔지만, 치마 길이가 짧거나 옷차림이 눈에 거슬리면 또 혼을 냈습니다. 화가 많고 욱하는 성질에 확 질렀다가 후회하는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부부간에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아이들과 관계가 얽히면서 저는 아이들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저는 3남 1녀 중 막내입니다. 없는 살림에 형들과 누나는 각자 공부하느라 바빴고 저는 방치되었던 듯합니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혼자 있던 기억이 많습니다. 부모님과 관계에서 따뜻한 정을 느끼기보다 좀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선생님,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았고 사람들을 웃기며 유머도 나눌 줄 아는 까불이였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선입견이 강했습니다. 사회생활에서도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사람을 가려 만났습니다. 분별심도 많았는데, 편견을 크게 내려놓게 된 계기가 한 번 있었습니다.
무역회사에 근무할 때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 서울 관광 안내를 했는데, 50-60대 정도 된 간부들이 계속 담배를 권했습니다. 당시 30대 초반이던 저는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기에 난감했습니다. 그때 한 간부가 중국에서는 아이들이 어른과 마주해 담배를 피우는 게 흔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제 기준에서 도덕적으로 잘못인 것이 꼭 틀린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다음 날 출근하며 담배를 피우는 여학생들을 봤습니다. 예전 같으면 욕을 하며 지나갔을텐데, 그날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또 저 자신도 중학생 때부터 담배를 피워놓고 정작 어른이 되자 담배 피우는 학생들에게 고함을 쳤던 제 행동의 모순이 보였습니다. 어떤 현상을 ‘틀렸다’고 정해두니 그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됨을 알게 됐고, 그렇게 사회적·관습적 통념에서 한발 물러서는 경험을 했습니다. ‘틀리다’가 아닌 ‘다르다’에 대한 첫맛을 본 경험이었습니다.
정토회에서는 ‘만만한 남자 조길래입니다!’라고 큰소리로 인사하며 소위 오락반장 역할을 해왔습니다. 처음 불교대학 담당을 맡았을 때는 학생이 결석하면 ‘내가 남자라 따뜻하게 보듬어주지 못해 그런가’ 하는 자책으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돌려 ‘이 큰 정토회에서 우리 반 학생 몇 명 그만둔다고 별 표시가 나겠나’ 라는 생각으로 편하게 했습니다. 이후 수원 법당 저녁팀장 소임 등을 맡아 활동했고, 지금은 행복본부 강원경기남부지회 수원센터장을 맡고 있습니다. 행복센터장 소임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못지않게 책임지고 끌고 가야 하는 부분이 많기에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영업을 계속 해왔던 터라 금전 정리나 서류 올려 보고하는 일들이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영업사원에게는 문을 탁 열고 들어가는 그 순간이 제일 무섭습니다. 정토회 소임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잘 모르는 일도 첫 문을 탁 열고 들어가면 되는데, 그 문 여는 일이 늘 어렵습니다.
정토회를 만나고 생활이 아주 건전해졌습니다. 전에는 사회생활을 핑계로 술 담배도 많이 했고, 거래에 필요하다 여겨 거래처 사장들과 골프도 치고 도박도 했습니다. 불법 만나 그런 걸 다 끊었더니 이제는 심심해서 정토회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현명한 집사람이 저를 정토회에 넣어두고 본인은 나갔습니다. 집사람과는 서로 간섭받는 걸 좋아하지 않고, 대신 서로를 인정해줍니다. 정토회 활동을 하며 가정에서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법당에 남자 도반이 드물어 많은 보살핌과 아낌을 받았고, 잘 안 맞는 도반도 딱히 없었습니다.
제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습관적인 ‘화’였습니다. 존경받는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그러한 바람이 제 화로 인해 허물어지는 게 힘들었습니다. 정토회를 다니면서 화내는 걸 멈추겠다 다짐하고는 아이들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동안 화내며 했던 말이 상처가 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아빠가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문자를 보낸 후에도 화를 내고 후회하고 사과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깨달음의 장>을 마칠 때에는 이제 정말 화를 안 낼 수 있겠다며 자신만만했지만, 화가 계속 올라올 거라던 자광 법사님 말씀이 딱 맞았습니다. 하지만 제겐 가족에게 다가가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내 생각과 기준을 내려놓으니 아이들이 다시 보였습니다. 화내고 다시 사과하고 하는 일들이 반복됐지만, 소통을 놓지 않았습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한 지 2년 정도 되자 아이들이 ‘아빠’를 부르며 품에 안겨 왔습니다. 3년이 되니 정말 화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요즘엔 아이들이 아빠에게 이런저런 지적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너희들 너무 무례한 거 아니냐고 장난스럽게 물으면, 아빠는 변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편하게 말하는 것이라며 저에 대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지금은 딸아이의 옷차림 노출에도 편안합니다. 아이가 짧은 옷을 입는 게 문제이기보다 그런 상황을 문제 삼는 사회와 그걸 이용하는 범죄자가 근본적인 문제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생각 하나 탁 바꾸면 되는데, 여전히 옛 관습에 갇혀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방향과 목표를 정하고 꾸준히 나아갔을 때는 결국 내 것이 되겠지만, 습관이 되기 전까지는 잘 안되는 게 현실이었습니다.
‘천일결사’가 뭔지 ‘회향’이 뭔지도 모르는 채 그냥 소풍 가듯이 따라가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침 기도 덕분에 꾸준히 연습할 수 있었고 아이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대화와 웃음도 자연스럽고, 아이들도 아빠를 믿어주니 많이 행복합니다.
저는 법을 전할 때 집사람이 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씁니다. “당신과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 그 말만큼 잘 통하는 말은 없는 듯합니다. 바빠서 불교대학을 못 다닌다는 지인에게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 바쁜 게 뭐가 있냐”고 되묻기도 합니다. 전법은 주로 거래처 관계자에게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농담 삼아 ‘거래대금 받아가려면 행복학교 입학부터 하라’는 식으로 재밌게 말하기도 합니다.
전법을 위해 행복학교 조끼를 입고 길에서 줍깅을 하거나, 행복학교와 함께하는 역사기행을 열기도 했습니다. 또 희망편지가 담긴 시화전을 열었고 반응도 좋았습니다. 희망편지 시화전을 할 때는 구경하는 분들에게 부담을 드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행복학교 안내서나 간단한 간식 등을 한쪽에 놓아두고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면 젊은 연인들이 시화전을 구경하며 한 바퀴 돌고 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편안하게 사진을 찍어가기도 합니다.
행복학교는 선배 도반들이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고 코로나 발생까지 겹쳐 정착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행복학교가 온라인으로 전환된 후 참여했기에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불교대학이 ‘정말 공부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내야 한다면, 행복학교는 친근하고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 생각합니다. 볼펜 하나가 옆에 있으면 그걸로 글을 쓰고 싶고, 망치가 옆에 있으면 못을 박고 싶듯이, 행복학교는 ‘행복’이란 툭 던져진 주제로 불법에 쉽고 친근하게 다가가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에게는 행복학교 소임이 아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정토회는 놀이터입니다.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이렇게 맑고 깨끗한 놀이터에서 놀 수 있을까요? 이제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는 놀 생각이 없습니다. 불교대학에 입학할 때 ‘겉모습과 속마음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러다 법사님께 겉과 속이 같으면 그게 부처라는 말씀을 듣고는 그 다짐이 결코 작은 원이 아니었구나 싶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웃는 모습이 전에는 썩은 미소였다면, 이제는 많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제 기도문 중 하나는 ‘오늘도 밝은 얼굴, 맑은 마음으로 걸림 없는 하루를 보내겠습니다’입니다. <스님의 하루>를 읽을 때 늘 배움이 있고 마음이 치유되듯이, 저의 일상도 누군가에게 치유의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오늘 인터뷰한 글을 나중에 읽으면서 부끄럽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대학 홍보를 하던 중, 어둡고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유난히 밝은 표정을 짓고 있던 한 사람을 보며 ‘나도 어디서든 저렇게 좀 밝은 얼굴을 보이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는 조길래 님. 그 말씀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마음에 제 얼굴에도 미소가 번집니다. 조길래 님의 바람처럼,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마음에 맑은 희망과 잔잔한 미소가 깃들었으면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나’를 발견하며 변화해 온 멋진 아버지를 인터뷰할 수 있어서 뿌듯하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글_이정원 희망리포터(인천경기서부지부 광명지회)
편집_이혜수(서울제주지부 성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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