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정토행자의 하루
살살살, 17년째 긋는 성냥불

오늘은 17년째 성냥불을 '살살살' 긋고 있는 편집자의 '일상에서 깨어있기' 이야기입니다.

하기 싫어서 하는 108배

제게 기도는 17년째 하는 습관입니다. 그냥 습관. 새벽 5시를 지키지 않고 눈뜨면 하는 습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렇게 된 지는 꽤 오래됐습니다. 16년 전, 〈깨달음의 장1〉에 다녀와서 처음 기도할 때 너무 억울해서 무릎이 꿇어지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빨리 무릎을 꿇습니다. 왜냐하면 108배가 너무 하기 싫어서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마음은 항상 변한다고 하는데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또렷한 마음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하기 싫다'라는 마음. 그래서 아침기도를 합니다. 청개구리마냥 제가 너무 싫어하니 17년째 빠지지 않고 합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할 때, 스님은 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보살님, 남편한테 숙이세요?”
“숙이는데요.”
“겉으로만 숙이지 말고, 마음 깊이 숙이세요."

그다음 날, 제 무릎은 또 꿇어지지 않았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그토록 숙였는데 뭘 더 숙이라는 건지. 남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말대꾸 안 하고,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줬는데, 이해가 안 됐습니다. 심지어 스님은 정말 (여성에게는) 짜도 너무 짜다는 생각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도 제 업식이 '하던 일은 계속하는 업식'인지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꿇고 또 꿇다 보니 제 툭 튀어나온 입이 보였습니다. 말대꾸를 안 한 것은 남편 말이 말 같지 않아서였지, 숙여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얼굴은 화를 꾹 참아 벌겠습니다. 이런 얼굴을 하고 남편이 시키는 대로 다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니... 속마음으로 ‘너 어디 두고 보자’라는 뿌리 깊은 원망을 하고, 겉으로만 입 꾹 다물고 다녔습니다. 무릎을 꿇고, 또 꿇으니 어느 날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숙이는 마음이구나’ 정말 신기한 건, 제 안에 가시 돋친 마음을 빼고 숙였을 때, 기가 막히게 남편은 눈치챘습니다. 제가 진짜 숙인다는 것을.

청평사에서 맨 오른쪽
▲ 청평사에서 맨 오른쪽

엄마 기대에 어긋나보자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22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2022년이 되는 동안 저는 또다시 망각의 늪을 여러 번 건넜습니다. 또 숙이는 마음이 뭔지 까먹는 망각의 늪. 남편이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경험의 파도를 거세게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착각에 빠졌습니다. 자식만큼은 내 뜻대로 될 거라는... 내 기준에 맞는 사람과 연애하고, 직장 잡으라면 잡고, 내가 원하는 학교로 가라면 가고... 그런데 두 딸이 어느 날 말했습니다.

“엄마, 언니가 엄마 기대에 어긋나재. 안 그러면 엄마 기대가 계속 높아진대. 한번은 꺾어야 한대.”

그 말을 듣는 순간,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나 딸들이 던진 농담 같은 진담은 제 마음에 깊은 웅덩이를 만들었습니다. 저도 엄마의 기대가 너무 높아서 꺾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말하는 세상의 삶과는 정반대로 선택했습니다. 물론 그 다른 세상이 제게 인생을 크게 배우게 했지만, 딸들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15분의 유통기한

그래서 이번 2022년 신년 정진 기도문을 ‘물처럼 맞추겠습니다’로 삼았습니다. 물은 그릇의 모양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그릇에 맞추기 때문입니다. 아주 쓸모없이 생긴 깨진 그릇에도 자신을 맞추는 물. 나라는 ‘아상’을 완전히 내려놓는 물처럼, 맞춰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물처럼 맞추겠습니다?
▲ 물처럼 맞추겠습니다?

아, 그런데 ‘물처럼 맞추겠습니다’라는 기도는 딱 108배 하는 15분만 유통기한입니다. 기도가 끝나고 방석을 접는 순간, ‘아니 근데 이것들이...’라는 말꼬리표가 제 입에서 줄줄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다음 날 기도 방석을 펼 때, ‘아차, 내가 물이 되겠다고 했지?’라고 떠올립니다.

100일이 끝날 때, 다시 기도문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처럼 사는 것은 도저히 못 하겠다. 좀 할 만한 걸로 바꾸자. 참고, 알아차리고, 숙이고,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이렇게 또 하기 싫은 마음이 넘쳐서 쏟아집니다.

그런데 딸들이 파준 웅덩이가 자꾸 기도할 때 보입니다. ‘나도 엄마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힘들었는데, 내 딸들도 나한테 그렇게 느꼈나 보네. 내가 싫었던 걸 왜 딸에게 하려고 하지?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야. 윤회를 멈춰보자.’

확 깨달을까 봐

성냥불은 ‘살살살’ 백번 천번을 긋는다고 켜지지 않는다는 스님 법문이 떠오릅니다. 단박에 힘주어 ‘탁’ 그어야 켜집니다. 성냥불만 ‘살살살’ 그은 지 17년입니다. 돌아보면 저는 17년을 안 빼먹고 기도했다는 ‘상’으로 ‘나’를 삼습니다. 우스개소리로 ‘탁’ 그으면 ‘확’ 깨달아 버릴까 봐 오늘도 ‘살살살’ 긋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물처럼 맞추겠습니다’라는 명심문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말, '성냥불을 단박에 확 긋겠다는 말' 솔직히 아직 시원하게 못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나를 돌아보는 일은 하겠습니다. 언제 이 기도하는 아침 시간이 좋아질지 모르지만, 상관없이 합니다. 하기 싫어도 하고, 하고 싶어도 합니다. 기도는 내 마음의 아침밥이니까요.

글_편집_정토행자의 하루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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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이미지를 누르면 텔레그램 '정토행자의 하루' 채널로 이동합니다.


  1. 깨달음의 장 4박 5일 기간의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평생에 한 번만 참여할 수 있음. 

전체댓글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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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ene

확 깨달을까봐 살살살 긋는다는 게 너무 공감됩니다. ^^

2023-10-08 17:31:40

자비행

보살님 수행담 읽으면서 숙이는 게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큰 위로가 됩니다. 감사해요.

2022-08-01 16:14:28

선주

너무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저도 살살살. 하고 있어서요 ㅜㅜ
나 자신과의 싸움을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내마음의 아침밥은 꼭 빼먹지 않겠습니다~^^

2022-07-13 10:3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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