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특집] 대중법사님 이야기
향음법사님 두 번째 이야기
분홍색을 좋아하는 투사

정의를 외치고 앞장서는 투사를 떠올리면 강렬한 붉은색이나 평화를 의미하는 푸른색이 떠오릅니다. 무엇이든 꽂히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을 모아 의기투합하며 앞장서던 향음법사님이 가장 좋아하는 색은 분홍색이랍니다. 우연히 분홍색 표지의《월간정토》를 만난 법사님은 투사같은 열정으로 정토회 북한동포 돕기 운동을 하고, 어린이 법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향음법사님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시아버지 병구완과 분홍색 정토지

남편의 미국 유학으로 온 가족이 미국에서 살던 어느 날, 시아버지에게 갑작스레 병환이 생겼습니다. 작은 아이 출산 후 산후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시아버지 병구완을 하라는 친정어머니의 부름에 작은 아이만 데리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시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서 작은 아이와 온종일 생활했습니다. 머리도 헝클어지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병실을 왔다 갔다 하는 아이가 안쓰럽고 속상했습니다. 또 사소한 것으로 시어머니와 자꾸 부딪혀서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면 병원에서 후다닥 나와 집 근처 조계사에서 꾸벅꾸벅 절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습니다. 어느 날 조계사에 물건 파는 곳을 지나가다 분홍색 책자가 눈에 확 띄었습니다. 평상시에 분홍색을 좋아했는데 눈에 띈 그 책자가 바로《월간정토》 였습니다. 가격도 저렴해서 냉큼 집어 들고는 병원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읽었습니다.

‘나를 버리고 깨달음으로, 조금씩 나아지는 삶’ <깨달음의 장> 홍보 문구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늘 뭔가 쫓기는 듯 조급하고, 무언가를 의무감으로 해야 한다는 옥죄는 삶을 살았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뭔가 탁! 풀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게 뭐지? 이 책 참 좋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아버지 병환이 나으면 미국 가기 전에 꼭 <깨달음의 장>도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문경수련원에서 명상수련 공양바라지들과(맨오른쪽)
▲ 문경수련원에서 명상수련 공양바라지들과(맨오른쪽)

언제 돌아가실까요? 무너진 나의 허상

집에서 가까운 홍제 법당을 찾아갔습니다. 아래층에 단란주점이 있고 2층 법당 입구에는 붉은 주단이 깔려 있었습니다. 절도 아닌 것이 보기에 영 어색했습니다. 스님을 뵙기 위해 법문이 끝나길 기다렸는데 1시간 반을 기다려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면서 ‘내가 왜 이 스님을 만나러 왔지?’ 자문해 보았습니다. ‘시아버지 병구완으로 한 달 반이나 한국에서 다리가 묶여 있는데, 병이 나을 것 같지도 않고 돌아가시지도 않을 것 같은데, 이 생활이 언제쯤 끝날까요? 언제 돌아가실까요?’라고 묻고 싶었습니다. 스님이 점쟁이도 아니고 알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1996년 <깨달음의 장>을 등록하고 나서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월요일에 장례를 마치고 수요일에 문경으로 바로 갔습니다. 시어머니에게는 시아버지 좋은 곳에 가시라고 기도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고, 작은 아이는 친정에 맡겼습니다. 수련장이라고 터벅터벅 올라가 보니, 점심때여서인지 백화당 안마당에는 그릇마다 음식만 담겨있고 아무 볼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뭘 얻겠나 싶어 되돌아가려고 하니, 누군가 갈 때 가더라도 밥이나 먹고 가라 하여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밥을 먹고 나자, 바로 수련이 시작돼서 얼떨결에 수련장에 들어갔습니다. 법륜스님이 직접 진행하셨습니다. 저는 놀러 나온 사람처럼 우아한 척 많은 미사여구로 '며느리로서 시아버님 돌아가셔서 가슴이 아프다'라고 했습니다. 스님은 나이 들어서 돌아가셨는데 그게 뭐 가슴 아플 일이냐며, 시아버지를 위해서 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우는 것이라고 따끔하게 저의 위선을 지적해주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저는 4년 내내 투사처럼 데모하다 대학생활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안에 분노가 많았습니다. 스님은 제 모습을 아셨는지 나누기 말을 준비하고 차례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제 앞사람까지 쭉 진행하다 제 차례가 되면 건너뛰어 옆 사람을 시켰습니다. 준비하고 있는데 넘어가면 준비한 말과 마음이 와장창 깨져 버렸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저의 허상과 허세를 깨뜨렸습니다.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천일 릴레이 정진을 앞두고 백두산 정상에서
▲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천일 릴레이 정진을 앞두고 백두산 정상에서

독립투사가 된 기분, 북한동포돕기

돌아가는 미국행 짐가방에 묘수법사님이 준 《월간정토》를 한가득 챙겼습니다. 차에 싣고 다니면서 못하는 영어로 정토지를 교민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글학교 선생님과 유학생 부인들과 마음이 맞아 《월간정토》와 《금강경》을 돌려보며 공부하고 뉴욕에서 보내준 스님법문 카세트 테이프로 매주 우리 집에서 법회를 열었습니다. 법회 의식도 없이 저의 방식대로 법회를 했지만, 부부싸움 하던 부부가 싸움이 잦아들기도 하고, 불임클리닉을 다니던 도반이 아기가 생겼다고 하여 모두 신기해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재미있게 6개월 정도 법회를 진행하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환희심이 그득할 때였습니다.

1997년 귀국하면서 스님과 인연이 있으니 어딘가 적을 두고 정토회를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제동에 정토회 법당이 있고 재동에 월간정토와 환경교육원이 있는 정토회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재동은 제가 사는 동네이긴 했지만, 막상 적을 두고 싶으면서도 사무실을 지나칠 땐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빼꼼 거리는 제가 유수 스님의 눈에 띄어 홍제동 법당으로 갔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당시 모임 이름이 승만회였습니다. 승만회 회원이 되어 작은아이를 데리고 법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북한동포돕기 서명운동을 하던 때라 회원들과 서명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였습니다. 버스에 올라가서도 서명을 받았고, 전경에게 쫓겨 다니면서 서울역에서도 서명을 받았습니다. 법당 앞에는 전경이 보초를 서기도 했습니다. 남북 관계가 경직된 상태라 서명받기가 쉽지 않아서 마치 그런 상황이 대학교 때 하던 데모의 연장 같기도 했습니다. 다들 힘들다고 했지만 저는 마치 독립투사가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승만회 도반들과 같이 한 일 중 가장 보람된 일은 북한동포돕기 서명이 끝나고, 북한에 옷가지를 보내는 소임이었습니다. 모인 옷이 많아지자 재동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하니 창고를 빌려달라고 요청해 학교 창고에서 일을 진행했습니다. 영어로 된 장식이 있는 옷들은 빼고, 나머지는 깨끗하게 세탁하고 포장해서 보냈습니다. 영어가 쓰여 있어 보내지 못하고 남은 물품은 홍제 법당 앞에 좌판을 깔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끌어가며 팔았습니다. 무려 500만 원을 모아서 북한동포돕기에 성금을 보탰습니다.

지리산수련원 깨달음의장 공양바라지들과(아래 맨 왼쪽)
▲ 지리산수련원 깨달음의장 공양바라지들과(아래 맨 왼쪽)

어린이 법회, 상소문을 올리다

승만회가 홍제법당에서 활동하다가 서초법당으로 옮겨 왔습니다. 무엇이든 꽂히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을 모아 의기투합했던 기질이 또 발동했습니다. 승만회 활동을 하던 도반 자녀들이 비슷한 나이다 보니 어린이 법회를 만들자고 했고 실무는 제가 맡았습니다. 어린이 법회 운영은 아이들이 목탁도 치고, 방석도 까는 등 자율적으로 했습니다. 서초 법당에 어린이 법회가 있다고 해서 왔다가 다른 절의 거창한 법회를 생각하고 온 사람들은 오합지졸로 조그만 애들이 하고 있으니 실망하고 그냥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어린이 법회를 정토회에 자리 잡게 하고 싶었습니다. 유수 스님이 어린이 법회 장소도 마련하고 투명유리창도 설치해준다고 했지만, 상황이 안 돼서 마음에 원망이 생겼습니다.

야밤에 선실을 어린이 법회장소로 빼앗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선실에 책이란 책을 모아 가득 쌓아 놓고 ‘어린이 법회 하는 곳’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잠수도 타고, 때론 상소문을 써서 유수 스님 책상 위에 놓고 따지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철없이 대들고 했으면, 유수 스님께서 ‘나 스님! 나 스님!’ 하던 모습이 떠올라 지금도 생각하면 어이가 없습니다. 결국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청소년 법회는 저녁부 활동으로 근근이 진행하고, 어린이 법회는 떡볶이 간식해주면서 일요일에 따로 진행했습니다.

작은아이는 저와 법당으로 출퇴근하면서 지하철에서 한글이며 음악, 산수 공부를 했습니다. 정토회 활동도 함께 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가 되니 “내가 학교 가면 《월간정토》를 누가 배송하나요?” 하며 걱정했습니다. 한번은 학교에서 가정조사서를 가져와서 한숨을 쉬고 있기에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가족란에 유수 오빠, 무변심 언니, 묘덕 언니를 다 적어야 하는데 칸이 없다고 난감해해서 한참 웃었습니다. 문경 수련원에 갔을 때, 제가 아랫마을을 내려다보며 나중에 저기서 살아야겠다고 하니 작은아이가 수련원 뒷산을 보면서 여기가 이렇게 넓고 좋은데, 왜 저기 좁은 데 가서 살려고 하냐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법당은 우리 작은아이를 키워준 수행터이자 학교였습니다. 시어머니 모시랴, 남편 모시랴, 힘들게 살았지만 돌아보니 ‘매일 드나들던 정토회 봉사활동 덕으로 자식들이 먼 데로 튀지 않고 다 주변에서 이렇게 있구나’ 하는 감사의 마음과 안도감이 듭니다.

빈그릇100만서명을 달성하고 환경사업부원들과 함께 인도성지순례에서
▲ 빈그릇100만서명을 달성하고 환경사업부원들과 함께 인도성지순례에서

모두 다 바꿔!

형제들을 보면 제 업식과 판박이입니다. 일단 좋다 하면 주변에 떠벌려서 이거 해보자는 업식이 있습니다. 일을 논리적으로 하기보다는 감각적으로 했고 극단적인 사고도 많이 했습니다. 대학교 때 처음 데모를 해서 동기들은 무서워 다 도망가는데, 저는 스크럼에 들어가 끝까지 했습니다. 선배들조차 저를 과대평가했고 제 기준에 맞추느라 힘들어하고 쫓아오느라 애를 썼습니다. 고집이 세서 조금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무조건 제 방식대로 바꿨습니다.

108배도 꾸준히 하지 못하면서 300배도 하고 500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기도를 놓치기도 하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보였는지 자재 법사께서 '그냥 108배를 꾸준히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정토회에 와서 정토회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알던 지식을 정토회에 심으려고만 했습니다. 지켜보던 유수 스님이 제일 힘들었을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바꾸고 싶은 게 많았는지 돌아봐 집니다.

대중법사님 특집기사 발행일정표
▲ 대중법사님 특집기사 발행일정표

위 이미지를 누르면 텔레그램 '정토행자의 하루' 채널로 이동합니다.
▲ 위 이미지를 누르면 텔레그램 '정토행자의 하루' 채널로 이동합니다.


인터뷰 진행_김난희
인터뷰 지원(영상, 녹화)_김혜경
글, 편집_장준분, 박문구, 강현아
도움주신이_이정선, 백금록, 박우경, 김승희, 박정임, 전은정, 장은미, 권영숙, 서지영, 김세영

전체댓글 15

0/200

윤현정

유수스님의 '나 스님 ' '나 스님' 부분에서 빵 터졌습니다 .
향음법사님의 열정 멋지십니다

2022-05-24 06:17:44

김희란

열정 가득한 마음이 전해지는 듯
합니다.
108배를 꾸준히 해보라는 글귀가 다가옵니다

2022-05-21 18:07:48

윤명희

감사합니다.

2022-05-21 09:37:21

전체 댓글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특집] 대중법사님 이야기’의 다른 게시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