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정토행자의 하루
내가 쏟아낸 말들이 내게로 다시 돌아와

오늘은 편집자의 일상이야기입니다.

우길 걸 우겨야지

15년쯤 됐을까요? 제 가게에 두부, 콩나물을 공급하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저는 이 아저씨를 무척 싫어했습니다. 싫어하는 이유를 열 가지 정도를 들 수 있지만 딱 세 가지로 요약하겠습니다. 첫째, 자기 물건이 무조건 좋다고 우깁니다. 둘째, 가끔 술 먹고, 연락 두절에 물건을 안 줍니다. 셋째, 늘 배실배실 남이 속이 터지든 말든 잘 웃습니다.

"아저씨, 콩나물 상태가 너무 나빠요."
"아닌데요? 이거 디게 좋은 건데요? 얼마나 정성 들여 키운 건데요?"

"아니, 정성 들여 키웠어도 보세요. 주저앉았잖아요. 지금 막 온 게 이렇게 주저앉으면 어떻게 팔아요?"
"이거 수분이 많아서 그런 거지 좋은 거예요."

"아, 답답해. 수분이 많다는 건 아저씨 생각이고, 판매하는 저는 상태가 이러면 못 판다고요. 제발 우길 걸 우기세요."
"아니라니까요. 정말 이 콩나물이 최고라니까요."

와, 이 아저씨는 화도 안 내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끝까지 자기 물건이 최고라고 우깁니다. 처음에는 제가 콩나물에 대해 뭘 몰라서 그런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념이 너무 강한 사람이 우기면 괜히 제가 잘못한 것 같은 생각도 드니까요. 그런데 다른 매장 콩나물을 보니 좋기만 합니다.

15년간의 구박

"아저씨, 전화를 왜 안 받으세요? 못 오시면 못 온다고 말을 해줘야죠. 손님들이 물건을 기다리잖아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술 먹고 뻗어서 그러네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저는 술 먹고 뻗었다는 아저씨의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제가 술 먹고 뻗어서 다음날 자기 일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 엄청 싫어합니다. 이 두부 아저씨, 저한테 딱 걸렸습니다. 그렇게 술 먹고 뻗어서 못 올 때마다 조용히 넘어가지 않고, 구박했습니다. 그런데 두부 아저씨, 정말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행동을 바꿀 법도 한데 정말 꿋꿋하게 제 구박을 그냥 흘려버릴 뿐입니다. 와, 정말 이걸 두고 인간 승리라고 해야할까요?

사라진 잔소리

그러던 어느날, 아저씨는 그대로인데 제 구박이 사라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김장철 절임 배추를 공급할 때였습니다. 지금은 산지에서 바로 발송하는 형태지만 그 당시는 저희 매장에 물건이 도착하면 공급하던 때였습니다. 그날따라 물건이 너무 늦게 들어와 손님 집에도 공급이 늦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이 저더러 대뜸 "아니 지금이 몇 시예요? 도대체 김장을 하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라고 소리를 빽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얼음이 됐습니다. 제가 가게를 하고 있지만, 저한테 소리 지르는 손님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다지 실수하는 편이 아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손님들 성격이 좋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못 했고, 아주 속상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김장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와 있는데 물건이 늦으니 그 손님은 애가 탔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어떻게 나한테 이러지? 산지에서 물건이 늦게 왔다고 설명을 했는데도 화를 저렇게 낸단 말이야?’라는 생각으로 많이 섭섭했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건, 바로 그때 딱 떠오른 사람이 저한테 욕먹던 두부 아저씨였습니다. 저의 잔소리를 엄청 들으면서도 웃던 두부 아저씨가 저와 겹쳐졌습니다. 다만 그 아저씨는 웃는 모습이고, 저는 화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두부 아저씨에게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 아저씨의 심정이 이랬겠구나. 동생 같은 나와 싸우지도 못하고 넘어가 주셨구나.' 이렇게 돌고 돌아서 내가 뱉은 말들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옴을 경험했습니다.

그후로 저는 두부 아저씨에게 잘합니다. 연락이 잘 안 될 것을 대비해서 두부를 많이 받아둡니다. 아저씨는 저의 그런 배려에 오히려 전화를 잘 받습니다. 제가 분별을 내서 문제를 키웠지, 이해심을 내니 상대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비난하는 마음일 때는 바늘 하나 꽂을 자비심이 없었는데 한 생각을 바꾸니 비난이 고마움 속으로 저절로 녹아들었습니다.

설마 깨달았나

"아저씨, 믹스 커피라도 한잔 드릴까요?"
"아니요, 사모님 먹고 있는 원두커피 좀 나눠주세요."

"아이고, 이거 제가 입을 대서 못 드려요. 믹스 커피는 별로예요?"
"아니, 사모님이 먹는 커피가 더 비싼 거잖아요. 먹는 음식인데 누가 먹던 거면 어때요? 그렇게 따지는 거 안 좋아요. 사모님이 먹던 거 나눠주세요."

아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아저씨입니다.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다는 불구부정의 도리를 혹시 깨달았나? 피식 웃음이 납니다. 저는 이 아저씨에게 또 배운 것이 있습니다. 아저씨는 제가 알기로 돈을 많이 못 법니다. 그렇게 일하고 돈을 잘 벌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지만 어쨌든 돈이 없는데 돈에 대한 집착도 없습니다. 집착이 없으니 욕심도 없습니다. 욕심이 없으니 늘 웃습니다.

잔돈은 모금통에

"잔돈은 모금통에 넣어주세요. 얘도 밥을 먹어야죠."

JTS 모금통
▲ JTS 모금통

저희 가게 JTS 모금통 밥을 제일 많이 주는 사람이 두부 아저씨입니다. 물건을 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돈을 드리는데 꼭 잔돈은 모금통에 넣습니다. 500원이 될 때도 있고, 800원이 될 때도 있습니다. 두부 아저씨가 자꾸 밥을 주니 저도 덩달아 경쟁하듯 밥을 줍니다.

"아저씨는 화나는 일 없어요?"
"아이고, 다 감사한 일인데 화낼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래도 기분 나쁜 일은 있을 것 아니에요?”
“제가 화를 내보기도 했는데 내 손해더라구요. 웃고 사세요. 웃고 사는 게 좋아요.”

설마 이 아저씨, 깨달음? 이런 생각을 하니 또 웃음이 납니다. 자로 잰 듯이, 저울에 물건을 달 듯이, 인생을 사는 저에게 사는 방식은 너무 달라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두부 아저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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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이미지를 누르면 텔레그램 '정토행자의 하루' 채널로 이동합니다.

글_편집_정토행자의 하루 편집팀

전체댓글 29

0/200

김정은

감사합니다.
싫어하는 이유가 많았으면서도
15년 거래하는 이야기속에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2022-11-30 09:31:07

배병갑

불편함을 편함으로 돌려 놓았으니 멋지십니다~~^^

2022-03-04 23:02:22

앙영수

소중한 이야기네요.. 매일 울컥하고 화내는 내자신이 한심스러운데 오늘도 배우고 갑니다..

2022-02-11 01: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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