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강원도 태백에서 2남 4녀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46살에 임신한 어머니는 처음에는 임신인 줄도 몰랐다가 병원에 가서 임신인 줄 알았고, 원하던 임신이 아니라 저를 지우려고 하셨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도 어머니는 삼일동안 혼수상태일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태어났지만 부모님은 너무나도 큰 사랑을 줬습니다. 늙은 나이에 낳은 자식이라 많은 걸 해줄 수 없다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으로 본인들이 해주실 수 있는 건 다 해 줬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어머니는 오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속상한 일들이 있으면 제게 얘기했지만 저는 받아주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서인지 어머니에게 마음 한 켠 내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언니 입장에선 그런 게 아닐 거라고, 어머니가 오해한 거'라고 가르치려고 했지, 어머니의 속상한 마음은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보름 전쯤, 새언니와 크게 다투고 속이 상해 막내 아들 집과 우리 집을 번갈아 가며 지냈습니다.
어느 날부터 아프기 시작한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 집에 있는 거 자체가 저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청소하다 울고, 밥 하다 울고, 그렇게 1년을 울며불며 지냈습니다. 요즘은 문득문득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랑만은 한없이 주기 위해 노력해 줘서 고맙고, 덕분에 행복하게 막내 딸 잘 살고 있다고, 이제는 고단한 삶 다 내려놓고 편히 극락왕생하세요' 라고. 지금도 한없는 사랑을 준 부모님이 그리워집니다.
내 뜻대로 자라준 큰 아들, 제가 열심히 잘 가르치고, 잘 이끌어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큰 아들이 참 많이 참았구나가 보입니다. 사춘기도 없었던 큰아들은 저에게 맞춰주느라 바빴습니다. 나의 자랑인 큰 아들의 학교 친구 엄마들과도 자연히 친하게 지냈습니다. 제가 아프면 병원을 데려다줄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별의 별 얘기를 다 나누며 지냈는데, 그 중 한 명이 저를 엄청 미워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전해듣고 밤잠을 설치던 날들이 여러 날, 저를 미워하며 하던 일들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친구 엄마와 그 말들로 고스란히 상처 받는 나! 서서히 그 친구 엄마들과는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 후 상처받았던 일들을 되새기며 그 사람들을 원망하며 피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인터넷에서 희망편지를 봤고, 그 글귀를 읽으며 너무나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정토회가 뭔지도 모르고, 법륜스님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매일 아침 일과의 첫 시작은 늘 희망편지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편안히 하고,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토불교대학 입학 안내 글이 떠서, '여기 가면 이런 좋은 말 많이 배울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근처 법당을 찾았습니다.
어떤 분이 반갑게 맞이해줬고, '모든 것은 사용하면 익숙해지고 편안해 지는데, 사는 건 왜 그렇지가 않을까요? 살면 살수록 난 자꾸 벽이 생기네요.' 라는 저의 말에 그 분은 '여기 온다고 해서 모든 게 청정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이 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여러 말들이 있지만 그래도 다른 것은, 모두 다 수행자라 외부처럼 소란스러움은 없을 거에요' 라는 얘기를 해줬습니다. 그 말은 저에게 큰 확신을 줬습니다. 너무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오히려 믿음이 생겼고, 이렇게 솔직한 곳이라면 믿고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간절히 절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저 정도는 아닌데' 하며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불교대학 담당에게 그만 두겠다고 했더니, '경림 님은 왜 남의 걸음을 보세요. 여기는 경림 님 걸음으로 가는 곳이에요. 남의 걸음을 보고 따라가는 곳이 아니에요.' 그 말을 듣고 난 후 집에 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짜 남의 걸음을 보고 부담을 느낀건가? 그래! 내 걸음으로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범생인 큰 아들 일로 학교를 가게 되면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반가운 마음으로 환영해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너무 잘 키웠다는 칭찬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큰 아들과 많이 달랐습니다. 덩치도 크고, 부모에게 자잘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학폭위(학교폭력 대책 심의 위원회)에 불려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가해자 부모가 5팀이었고, 피해자 부모는 그 당시 피해자를 때린 사람으로 작은 아들을 지목했습니다. 나머지 가해자 아이들과 부모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용서해주겠다는 피해자 부모의 말에 하나같이 피해자 부모 편에 섰습니다.
가해자 부모들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집에 와 방에서 혼자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그러고서는 결심했습니다. '내가 이 아이 옆을 지켜야겠다, 더 이상 이 아이가 올바르지 않은 길로 발을 들여놓지 않도록 내가 지켜줘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친하게 지내는 도반에게 당분간 정토회 활동을 할 수 없음을 알렸고 법당 출입을 멈췄습니다.
그후 저는 작은 아들에게 모든 관심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아이에게 집착하고, 그런 집착이 버거웠던 아이는 저를 피해 도망다니려 하고 그렇게 1여년 동안 서로의 갈등의 골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 불만 가득한 작은 아들과 얘기를 했습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야. 네가 보기에는 엄마가 많이 부족하고 네 맘을 몰라줘 속상하겠지. 네가 보기에는 그럴 수 있어. 엄마도 이해가 돼. 하지만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참 많이 어렵고, 부모이기에 또 노력하고 있는거야' 하며 얘기하니 작은 아들의 눈빛은 어느새 사르르 녹아있었고, 다음 날부터 작은 아들은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렇게 1여년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나아지는 줄 알았던 작은 아들은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더 큰 사고를 쳤습니다. 이번에는 학폭위가 아닌 고소가 들어왔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담담했습니다. 이제는 기대할 것도, 바랄 것도 다 없어서였을까요? 전 작은 아들에게 '이제는 네가 선택해주면 좋겠다. 20살까지는 어쨌든 부모 말을 듣든지, 아니면 이제는 혼자서 독립하든지 해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우리는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으마.' 하는 말에 작은 아들은 부모의 말을 잘 듣겠다며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구나, 너도 이렇게 마음이 많이 힘들었구나. 학교에서는 문제 일으키는 아이라고 학교생활에서 배제되고, 너희끼리 뭉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겠구나'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작은 아들은 대안학교로 전학했고, 차를 타고 가는 그 모습을 보고 뒤돌아 나와 펑펑 울었습니다. 아직은 어리기만 한 아이를 정을 끊고 떠나보내버린 거 같아 마음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하루는 작은 아들의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행복하고 즐거워하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보며 그제야 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구나. 너의 모습은 보지 못한 채, 큰 아들의 모습 그대로 키워보려고 등떠밀었구나. 이 모든 괴로움이 다 내 탓이었구나, 이 아이가 나에게 부처님이구나, 이 아이가 아니었으면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며 살 수 있었을까?'
제 식대로 제 고집대로 이 아이를 키우며 오만했던 저 자신을 보고 참회하였습니다. 큰 아들 학교에 가면 늘 칭찬받으며 어깨 펴고 다니기만 했지, '이 아이가 아니었으면 숙이는 방법을 알 수 있었을까? 교만하고 고집도 세고, 이런 나를 깨우쳐주기 위해서 나에게 와 준 부처님이었구나.' 그 다음부터는 작은 아들에게 한없이 감사했습니다. '이런 엄마를 사람 만들어주려고 네가 고생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저에게 와 주어서 감사했고, 옳고 그름을 떠나 숙이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도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경림 님, 요즘 뭐하고 지냅니까? 잘 살아 있습니까? 요즘 왜 법당에 안 나오십니까? 내일이 천일결사 입재식인데, 입재하는 게 어때요?' 그렇게 도반은 저에게 전화를 자주 해 줬습니다. 집안일로 지쳐있을 때, 동네 지인들에게도 건네지 못하던 내 괴로움을, 도반들의 전화로 서로 마음을 나누며 힘을 얻었습니다. 저의 일상에서 어렵고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을 도반들에게 마음을 나누었고 그 괴로움을 다 들어주는 도반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9-7차 입재식에 참석하여 다시 법당을 나갔습니다.
그 후 서원을 세웠습니다. '이 법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너무 감사하다. 앞으로 3년동안은 회향하는 삶을 살리라. 그 때부터 나에게 오는 어떤 소임도 그대로 받는다.' 불교대학 경전대학 진행자, 모둠장, 홍보담당, 불교대학 인터뷰어, 경전대학 운영자 소임까지 그 모든 소임을 다 받았습니다. 사실 저 개인으로는 전법이 어려운 일이지만, 전법을 천직처럼 여기고 활동하시는 분들을 보니 '저 분들 덕분에 정토회가 굴러가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그 분들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한 분 한 분이 참으로 소중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홍보담당을 하며 저에게 무겁기만 했던 전법 소임을 저는 저대로, 상대는 상대대로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합니다. 다만 그 역할이 서로 다를 뿐이라는 것을 알고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이번 불교대학 인터뷰어 소임을 하며 이 전법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어떤 분은 남편과 사별한 지 얼마 안돼 힘들어 하며 정말 거기 가면 편안할 수 있는지 울면서 물어보는 분도 있고, 홍보 전단지를 보고 전화를 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를 의지하며 도반의 힘으로 나아가지만, 정말 이 길을 몰라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구나 싶어 전법 활동에 더 정성을 쏟았고, 힘든 분들한테 아주 중요한 첫걸음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보람되고 뿌듯했습니다. 받을 때 부담스러웠던 소임도 하나하나 해나가다 보면 어느새 행복한 나를 보게 되면서 '다음 전법은 좀 더 가볍게 할 수 있겠구나, 소임을 맡은 것은 저의 복이었구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소임이 복입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저를 되돌아봅니다. 이 소임을 맡아 일이 아닌 수행을 하며 나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봅니다. 경림 님의 소임이 복을 쌓는 것이라는 말이 지금은 다 소화되지 않지만, 제 속에 켜켜이 쌓여 수행을 해 나가는 것에 디딤돌이 되어주고 있음을 나중에는 실감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 분들의 삶의 경험이 전달되어 저에게 삶의 지혜를 알려줍니다. 한 분 한 분의 수행담이 그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값지고 소중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이런 소중한 수행담을 전해주는 경림 님에게 참으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글_김세영(일산지회 희망리포터)
편집_이정선(진주지회)
전체댓글 18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일산지회’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