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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신규교사로 발령받은 후 4년 간 교무실 제 옆자리에서 함께 생활하며, 집이 가까워 매일 출퇴근을 같이 하던 하 선생님은 저와 마음이 잘 통하는 단짝이었습니다. 교육계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어, 젊은 교사들을 중심으로 교육단체가 만들어지고 교사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학교 현장은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저와 하 선생님은 그 역동의 시절도 함께 보냈습니다.
하 선생님의 결혼식 일주일 후에는 제 결혼식이 있어, 단짝이 일주일 사이로 결혼하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바로 제 결혼식에 달려와 축하해주던 그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둘째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 선생님은 수학여행지에서 먹는 김밥을 토하면서 위암을 발견했습니다. 길지 않은 투병 후에 하 선생님은 서른여섯 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단짝과의 이별에 저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수업하다가도 눈물이 흘렀고, 퇴근길 버스 안에서 가슴이 아려와 저도 모르게 울곤 했습니다.
계속 힘들어하는 저에게 다른 동료 선생님이 힘이 됐으면 좋겠다며 월간 정토 일 년 구독권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정작 본인은 시어머니가 기독교인이라 지금은 다닐 수 없다며 저에게 손을 내민 것이었습니다. 일 년 뒤, 1998년에 혼자 동래법당을 찾아갔고 수요법회를 다녔습니다.
젊은 시절 교육단체 활동에 매진했고 제가 원하는 교육가치와 사회생활을 이해해주는, 그 당시 시간강사인 남편을 중매로 만나 한 달 만에 결혼했습니다.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남녀평등을 추구했던 당당한 그 시절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승진의 기회가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고 평교사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길을 걸어왔던 저는, 어느 날 갑자기 교육현장도 민주화되었으니 관리자가 되어 아이들을 위한 교육철학을 펼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승진의 길을 기웃거렸습니다. 젊은 시절 제가 가지고 있던 교육신념과 반하는 길을 걸으려 하니, 몸과 마음은 점차 피폐해졌고 뜻을 같이했던 활동가 선생님들과의 사이도 소원해 졌습니다. 제 삶에 대한 자긍심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수행의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제 업식대로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퇴근 후에는 불교대학과 수행법회 담당을 하며 그 시간만큼은 얼굴이 밝아지고 미소가 피어올라, 그 힘으로 직장의 힘든 시기를 버텨냈습니다. 욕구를 내려놓는 것이 수행임을 깨닫지 못하고 수행 따로, 욕구 따로의 세월을 살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금정법당이 개원하면서 지원담당으로 도반들과 함께 수행법회와 7대 행사를 운영했습니다. 강한 책임감으로 성실하게 했지만, 문득문득 일중심인 저를 보았습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강했고, 상대의 부족한 점이나 잘못한 점만 먼저 눈에 들어와 이를 고치지 않고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공정에 어긋난다고 여겨질 때는 공격적으로 반박하여 도반과 갈등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정토를 다닌지 오래인데 왜 이렇게 바뀌지 않는가 자문하면서, 2018년 3월부터 법당에 나가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면서 할머니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할머니가 저만 빼고 다른 손주들에게 치마와 도시락 보자기를 만들어주어, 담벼락에서 혼자 울던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부탁한 물건을 가지러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재봉틀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저를 야단치며 무섭게 노려보던 눈빛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런 기억에 꽂혀 할머니가 언니와 동생은 좋아하면서 저만 못마땅해한다고 생각했고, 저는 오랫동안 할머니를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인데, 9남매의 맏이이자 종손이었던 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애절함과 한은 이루 말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중학교 때,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쓴 시가 교지에 실렸습니다. 제가 쓴 시를 보고 '니가 애비를 그렇게 그리워하는지 미처 몰랐다'며 울먹이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심정이 이제사 느껴져 가슴이 아릿하며 눈물이 났습니다.
저를 돌아보니, 엄마보다도 더 따르고 좋아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옆에 없고 집안의 어른인 할머니는 저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지 않으니 할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어 나도 모르게 부족한 면을 먼저 찾아내고 채우려는 세월이 길었습니다. 어린 시절 만들어진 그 잣대가 어김없이 타인에게 작동했던 겁니다. 이제는 상대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일은 내게도 비수를 꽂는 일임을 명심합니다.
깨닫기는 해도 몸에 배인 습관은 쉬이 없어지지 않아 '내가 또 그러는구나'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함께 활동했던 도반들 대부분이 성장하고 있는데 저만 그 자리에서 계속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한 눈 판 저를 비난하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 순간 바로 '아차!' 하며 제가 했던 일들을 긍적적으로 떠올립니다. 정토 청소년 여름캠프 교사로 봉사한 일, 생명운동 아카데미에 친한 교사들을 모아 함께 들었던 일, 수행법회 담당 등등... 열심히 했던 순간도 참 많았는데, 한 눈 팔았던 순간에만 꽂혀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습관을 알아차리고 내려놓습니다.
또 교사로서 살아온 지난 날도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공익과 부조리 개선을 위해 교육단체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내 시간이 빠듯하게 아이들을 위한 학급활동을 운영했던 세월을 존중합니다. 그러면 자기비난이 잠시 중단되고, 잘못으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는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한 순간 삐걱거렸어도 정토의 끈을 놓지 않았음에 안도합니다. 명예퇴직을 하고 2020년 온라인 가을 불교대학 진행자 소임을 맡으면서, 제 인생경험도 쓰임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흔들리며 걸어온 길은 다른 사람을 더 넓은 가슴으로 포용하는 여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6개월 간 불교대학 수강생, 도반들과 함께 공부하며 보람있고 행복했습니다. 함께라서, 새로운 온라인 시대에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오랜 도반인 언니와 같은 길을 가며 의논할 수 있어 더 좋았습니다. 자매이자 도반의 소중한 인연에 항상 감사합니다.
지금은 행복시민모임 지원담당으로 생활의 활력을 받고 있습니다. 행복시민들 중에는 일상에서 공동선을 위해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 놀랍습니다. 한 도반은 매일 집 주변을 청소하다보니 이웃들도 동참하여 동네가 깨끗해졌다는 나누기로 실천의 중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온천천 쓰레기줍기 행복시민모임'을 한 번 했는데, 하루빨리 집단면역이 이루어져 더 자주 만나서 함께 활동하고 싶습니다.
최근 사촌언니를 만났습니다. 37년 전 제가 사촌언니에게 보낸 안부엽서 말미에는 '통일을 기원하며, 안혜원'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그 때와 변함없다는 언니의 말에 '그렇지. 내가 청년일 때부터 통일을 바랐지.' 하며, 젊은 날의 나와 하나됨을 느끼며 무척 기뻤습니다. 그 때는 젊은 혈기와 열정으로 통일을 바랐다면, 지금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어서 참 좋습니다. 정토회 덕분에 통일을 바랐던 젊은 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어 큰 복입니다.
지나온 제 삶을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속에서 이 땅의 평화와 통일에 도움이 되는 기량이 있다면 기꺼이 가져와서 써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지난 삶을 통합하면서 도반들과 함께 가는 이 길이 저의 노년을 계속 행복하게 할 것이라 믿으며, 수행의 전부는 도반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인공의 살아온 여정을 인터뷰 할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한순간도 함부로 보내지 않은 안혜원 님, 30년 전 바람이 통 특위로 이어져 활동하는 수행자를 보면서 '수행자의 향기가 이런 거구나' 하고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글_목승혜(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편집_임명자(광주전라지부 서광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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