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정토행자의 하루

운전대를 잡으면 나는 헐크가 된다

행자의 하루 편집팀에 '단아하다'는 이미지로 통하는 도반이 있습니다. 소통방에서도, 회의할 때도 항상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이 단정해서, 화내는 모습이 쉬이 그려지지 않는 도반. 이 도반이 운전대를 잡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네요. 스스로 다중인격자라 말하는 편집자의 일상에서 알아차린 수행거리와 행복을 나누어봅니다.

겁에 질린 토끼에서 무서울 것 없는 헐크로

빵빵!

맞은편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오는 차들을 무시하고 우회전을 하는 나에게 울리는 경적이다. 면허를 취득하고 집에 있는 경차로 막 운전을 시작했을 무렵, 도로에서 나를 향해 울리는 경적 소리는 익숙했다.

그 때의 나를 동물에 비유하자면 겁에 질린 토끼랄까? 갑자기 앞에 달려가는 차량이 브레이크를 밟을 것만 같고 오른쪽 골목길에서는 차나 자전거가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쩌다 시속 60㎞만 넘어가도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아 댔다. 시속 40㎞대가 늑대 이리 승냥이들이 활보하는 도로 위에서 내가 그나마 안정감을 느끼는 속도였다.

오른쪽 골목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 오른쪽 골목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빵빵!

“아니, 저 택시는 왜 1,2차선을 동시에 밟고 가는 건데!!”

빵빵!

“이봐요, 아줌마! 직진차선이 우선통행이라고요!! 갑자기 끼어들면 어쩌자는 거예요?”

빵빵!

“와~ 저 아저씨는 한 번에 3개 차선을 횡단하시네.”

도로 위 10년차.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경적을 울리고 차 안 허공에 대고 빽빽거리는 헐크가 되었다. 가끔 사고가 날 뻔한 순간에는 반대편 차량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때도 있다. 물론 창문은 내리지 못한다. 나보다 센 헐크를 만날지도 모른다.

속시원하게 창문을 내리고 싶다.
▲ 속시원하게 창문을 내리고 싶다.

헐크 변신이 풀리는 순간

차 안에 올라타자 뜨겁고 습한 공기가 훅 몸을 감싼다. 짜증이 조금 올랐다. 시동을 켜고 핸들을 잡자 가마솥에서 막 꺼낸 고구마마냥 뜨끈뜨끈 하다. 짜증이 조금 더 차올랐다. 골목길 양 쪽으로 주차된 차량들 때문에 큰 도로까지 나가는데 시간이 걸린다. 헐크로 변신하기 3초 전.

빵빵!

삼거리에서 마주친 차량과 부딪힐 뻔 했다. 이미 헐크가 된 나는 바로 경적을 눌러댔다. 그러자 이미 또 다른 헐크인 맞은편 운전자는 창문을 내리고 쌍자음의 단어들을 내뱉는다.

‘나도 이미 변신완료다. 질 수 없다. 쌍자음의 향연을 펼쳐보자!’

결심하고 내 운전석 창문을 내리는 순간, 맞은편 헐크 뒤로 돌잡이 아기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마주쳤다.

“아기를 태우고 운전을 그리 험하게 하시면 어떡해요?”

내 헐크 변신이 풀리고 나는 곧 순한 토끼가 되어 사근사근 말을 건넸다. 하지만 저쪽 헐크는 아직 변신을 풀지 못했다.

“남이야 뭘 태우던, 쌍자음 쌍자음!!”

나를 헐크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운전대 (남편 운전중)
▲ 나를 헐크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운전대 (남편 운전중)

누구에게 경적을 울리고 있는가

한 번은 지인들과 자동차 사고에 대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 10년 무사고에요. 단순 접촉사고도 한 번 없었어요.”

무사고 운전으로 자부심이 가득 한 내 자랑에 누군가 툭 던졌다.

“남들이 잘 피해주는구만.”

이 한마디는 그 동안 내가 운전대를 잡은 모든 순간을 돌아보게 했다. 2차선에 주차된 차량이 있으면 나도 1,2차선을 동시에 밟고 달리기도 했고, 경로를 잘못 알아서 갑자기 좌회전을 해야 할 땐 거의 동시에 차선 2개를 변경하기도 했다. 마음이 급할 땐 멀리서 오는 직진차량을 무시하고 좌회전을 할 때도 있다.

나는 나에게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저 대화를 나눈 시기가, 그 한 마디를 내가 비꼼으로 들을지 나를 돌아보는 깨우침으로 들을지 결정하는 힘이 생긴 정토행자가 된 후였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상대방 차 안에서는 내가 모르는 상황들이 있을 수 있다. 아픈 아기가 병원 가는 길일 수도 있고, 초행길이라 신호체계를 모를 수도 있다. 또 겁에 질린 또 다른 토끼 운전자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나의 무지가 울리는 경적은 차 안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마주쳤던 이후로 그 빈도가 줄었다. 내가 헐크가 되었다고 해서 마주치는 모든 운전자를 헐크로 가정해버린 나의 성급한 일반화를 깊이 참회한다.

아직도 나는 헐크로 변신하는 능력을 버리지는 못한다. 또 가끔 나도 모르게 헐크가 되었다가 변신이 풀리는 순간에는 ‘누구한테 화내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화풀이 하는 건데 뭐 어때!’ 하는 마음으로 나를 위로한다.

쌩쌩 달려오는 사방의 차들 사이에 끼어 벌벌 떨던 토끼가, 도로 위 무서울 것 없는 헐크로 되기까지. 나에게 수많은 경적을 울려주고 잘 피해가며 무사고 운전자로 키워준 선배운전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날려본다.

힐끗 보면 오해하기 쉽다. 자세히 보자!
▲ 힐끗 보면 오해하기 쉽다. 자세히 보자!


글.편집_정토행자의하루 편집팀

전체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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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산등

재미있는 글 잘 봤습니다 겁 많은 토끼님^^

2021-09-21 23:26:13

차보경

<~결정하는 힘이 생긴 정토행자> 이 말에 공감갑니다 사진설명도 그렇고 이 분 문체로 보아 이혼예정 부모님 따님 아닌가요? ㅋ

2021-08-08 16:20:18

지나가다

내 나이 이제 50대 말, 사회와 자녀에게 참회합니다.
젊을 때 차에 우리 아이들 태우고 저도 저랬습니다.
돌아보면 정토회 아니였으면 스스로 깨우치기는 커녕,
지금도 난폭운전의 강도가 줄어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이나마 알아차리고 내려놓고,, 줄여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참회하고, 저를 닮은 아이들에게 참회합니다.

2021-08-01 06: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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