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제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은 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부모님은 언니와 남동생을 데리고 곡성에서 따로 사셨습니다. 부모님이 작게 농사를 지으셨는데, 그러다 보니 가정 형편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모든 자식을 다 감당할 수가 없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저는 가족과 헤어져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컸습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저를 아주 예뻐하셨습니다. 식사 시간이면 여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저만 할아버지와 겸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의 살뜰한 보살핌도 부모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가끔씩 어머니가 할머니 댁에 다니러 오면 "제발 나를 좀 데리고 가" 하고 울며 떼를 썼습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 드디어 그렇게 그리워하던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객지로 많이 떠돌아다니셨고, 돈을 주기 위해서인지 가끔씩 집에 들리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집에 들어와 계실 때도 거의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들어왔다 다시 나가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니 가정을 챙기는 것은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내가 뭐라도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했습니다.
엄마가 "남동생을 학교 보내야 하니 너는 이제 공부를 포기해라"고 했을 때도 두말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어머니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기보다 중학교라도 보내준 것에 감사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경기도 부천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가정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일했습니다. 자존심도 무척 셌습니다. 돈 없다고 무시당하기 싫었고, 남한테 조금이라도 신세지기 싫어서 밥을 사면 샀지 남의 초대에 응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없으면 안 사고 말지 남에게 돈을 빌린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혹여나 금전적인 여유가 생겨도 지금 절약을 해야 나중에 남한테 손벌리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정말 아끼며 살았습니다.
가난했지만 구질구질하게 살기 싫어서 일 하나를 맡더라도 확실하게 해냈고, 힘든 일이 몰려와도 그저 참고 견뎠습니다. 엉겅퀴는 동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잎에 온통 가시를 달고 있다고 하지요. 당시 제가 딱 그랬습니다. 뭘 그렇게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는지, 참 억척스럽게도 살았습니다.
서울에서 회사 다닐 때, 당시 회사 동료였던 지금의 시누이가 남편을 소개했습니다. 남편은 종갓집 맏아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결혼하게 되면 1년에 제사 10번에, 시부모님 봉양까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정에서는 결혼을 많이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 성품이 좋아 보였고,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못 살 게 있겠냐'는 생각으로 결혼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시골로 내려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쉽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힘들게 살아와서 그런지 어려움을 견뎌내는 힘이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시집 식구들은 모두 성격이 좋았습니다. 시어머니와도 참 잘 지냈습니다.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간보다 시어머니와 함께 산 시간이 훨씬 길었는데, 시어머니와는 마치 엄마와 딸 같은 관계로 지냈습니다. '내가 하면 다른 사람이 수월하고 좋겠다'는 마음으로 항상 말하기 전에 먼저 나서서 일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어머니와 한 번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습니다.
남편 역시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시시콜콜 까다롭게 따지는 경우가 없고, 어떤 일이든 본인이 조금 손해 보려고 하지 이익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리판단이 빠르고 현명한 남편은 내가 어떤 일을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판단을 잘해주었습니다. 제가 워낙 고지식하고 자존심이 세다 보니 서운한 것이 있으면 따지지도 않고 꽁한 상태로 '너 어디 한번 보자 '하며 묻어뒀습니다. 저의 그런 성격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도 남편은 한 줌 햇볕처럼 항상 저를 따뜻하게 비춰주었습니다.
남편은 선비 스타일입니다. 교사를 했으면 딱 잘 맞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그런 남편이 10여 년 전부터 불교에 관심이 생겨 이 절 저 절을 다니며 불교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철스님, 법정스님 책을 정독하며 진리를 찾아가던 중 법륜스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2015년에 당진 법당의 개원 소식을 듣고 남편과 함께 당진법당 1기생으로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비록 남편은 회사생활이 바빠 졸업하지 못했지만, 저는 다음 해에 경전반까지 마치고 천일결사1에도 입재하였습니다.
무엇 하나를 시작하면 완전히 파고들어 끝까지 해내고 마는 성격 덕에 지금까지 천일결사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할 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너무 무덤덤하게 하는 것도 재미는 없지만, 일부러 특정한 하나의 원을 세우고 기도하지 않고 꾸준히 정진하며 그날그날 경전 내용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개인 수행을 꾸준히 하며 불교대학, 경전반 담당을 거쳤습니다. 법당에 정회원이 4명밖에 없다 보니 작년에는 지원팀장, 교육연수, 천일결사, 복지 담당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다 총무님의 건강이 악화되어 총무대행까지 맡았습니다. 텔레그램을 통해 이런 저런 공지가 내려오는데, 정말 하루종일 공지가 쏟아졌습니다. 컴퓨터도 거의 할 줄을 몰라 너무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버티는 힘은 있었던지라 여러 도반들에게 물어도 보고, 꾸역 꾸역 컴퓨터 교육을 받으면서 조금씩 적응해갔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덕분에 짧은 시간에 정토회 일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불교대학을 담당하셨던 분의 말이 떠오릅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물이 아래로 쭉 빠지는데 콩나물은 자라고 있잖아요. 스님 법문도 마찬가지예요.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려도 계속 듣다 보면 뭔가 자라고 있어요. “
제가 그분 말씀의 모델인 것 같습니다. 스님 법문 열심히 듣고 꾸준히 열심히 전법하다보니 이제는 법문이 제 생활에 자리 잡은 듯합니다. 끝까지 자존심 세우며 꽁해가지고 마음에 담아두고 괴로워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상대를 이해하니 괴로움이 없고 마음이 가벼워 좋습니다.
얼마 전 아들이 결혼 2년 만에 이혼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만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며 처음에는 아들보다 제가 더 힘들었습니다. 돌아서면 계속 눈물이 나고 며느리에 대한 원망의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은 상대적인 것이고, 아들의 인생이니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곧 돌이켰습니다.
마음을 비우니 어머니에게는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편에게는 '이렇게 잘 살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아들에게는 '엄마 아들로 살아줘서 고맙다', 내 형제, 지인, 인연 된 분들께 '모두 감사합니다‘ 그런 감사의 기도가 됩니다.
남편이 다시 불교대학을 다니게 되었을 때, 나누기 시간에 "우리 마누라가 정토회 다니면서 너무 많이 바뀌어서 궁금해서 나오게 됐다"고 했답니다. 물론 가끔 마음이 출렁출렁 요동쳐서 남편에게 짜증을 내고 툴툴거립니다. 그러다가도 남편이 “너 스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시대?” 하면 "아차!" 하고 금방 돌아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그때그때 다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헤쳐오느라 분명 힘은 들었는데, 지금의 삶이 그렇게 힘들지 않은 걸 보니 그 시간이 상처가 아니라 내 자산인 것 같습니다. 내가 편하게만 살았다면 지금이 불만스럽고 어려울텐데, 그 힘든 시간을 거쳐온 덕분에 단단해져서 지금 이만큼 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되면서 힘들다는 분들도 많은데, 오프라인으로 다져진 경험들 덕인지 저는 지금이 오히려 더 편하고 별로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덕분에 저 같은 사람도 컴퓨터를 다룰 줄 알게 되었고, 개인 법당으로 만들라며 남편이 같이 생활하던 방도 내주고 나갔으니까요. 남편 덕분에 경전반 돕는이 소임을 개인 법당에서 편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경전반 도반님들은 몇 개월만에 많이 친해져서 여고 동창회 모임 같다며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들어와서 안부를 나누고, 일상에서 수행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저만 잘하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최근에는 스님께 배운 대로 소박하게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텃밭에서 작게 농사를 짓고 있는데, 수확하는 농산물들을 지인과 도반들에게 나누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좀 덜 쓰고 아끼면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토회에 와서 나눔의 행복을 알게 되고 삶도 가벼워졌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정진하고 전법하며 행복 바이러스를 퍼트리고 싶습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김연옥 님의 모습을 보며 길고 긴 겨울을 견디고 찬란하게 꽃을 피우는 인동초가 떠올랐습니다. 앞으로 전원생활을 꿈꾸고 있다는 김연옥 님. 새로운 터전에서도 행복의 씨앗을 뿌려 나가시길 바랍니다.
글_허지혜 희망리포터(대전충청지부 천안지회)
편집_허란희(강원경기동부지부 수지지회)
천일결사 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만일)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천일)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
전체댓글 27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천안지회’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