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마포지회
어디서 이런 귀한 사람들을 만날까

오늘의 주인공은 용산법당의 얼굴이자 마지막 총무, 어현숙 님입니다. 소임중 꽃이라는 총무직을 내려놓으며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탁하면 다 되는 사람

나는 착한 여자였어요. 상대가 나한테 무엇을 바라는지 ‘읽혀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어 주는 사람. 사실은 내키지 않아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누가 부탁하면 다 되는 사람이었지요. 힘들었어요. 내가 한 번 두 번 세 번 들어줬으면 멈추어야 하는데 밑 빠진 독이더라고요.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는데 왜 끝없이 요구할까.

정토회에 와서 관리업무와 총무직을 수행할 때, 도반들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어요. 나는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았어도, 흔쾌히 들어준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요. 내가 그러니까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거예요. 작은 일도 가볍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냥 내가 다 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사람이 안 키워지더라고요.

그러던 중 재작년에 시스템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총무가 적임자에게 일일이 부탁해서 일을 꾸려갔다면, 지원팀장이 업무를 총괄하게 되면서 일감 나누기를 훨씬 부담 없이 하게 된 거죠. 그러면서 배운 거예요. 내가 다 해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는 방법을.

그래서 법당을 닫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는데, 아쉬운 거지요. 이제야 사람을 키워내는 재미를 보는데. 일 년만 더 있었으면! 우리 법당도 좀 더 튼실하게 활동가를 키워낼 수 있었을 텐데! 항상 법당에 나 혼자, 많아 봐야 두세 명 있었고. 그게 제 성격 탓도 있었던 거예요. 원체 낯가림도 있고, 혼자 일하는 게 편하고 사람들과 대면하는 게 쉽지 않은 사람이라. 내가 나를 보게 되는 거예요. 왜 이런 성격이 형성되었는지 내어놓기 시작하니까 가벼워지고.

더불어 산다

정토에 와서 내어놓는 연습을 진짜 많이 했어요. 사람 귀한 줄도 알고. 예전에는 관념이었다면 이제는 정말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되는 거죠. 평생 내 곁에 이렇게 사람이 많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같이 일하고 회의하고 뭔가를 만들어가고, 이런 경험들이 부족했던 사람인데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 배웠습니다.

총무를 내려놓고 서초에 새 소임 받아 간 것도, 일은 부차적인 거예요. 저는 사람을 만나러 갔어요. 정토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요. 법사님들도 계시고.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어야 배운 것을 잊어버려도 금방 찾을 수 있으니까. 온라인으로 법문만 듣다 보면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깨어 있기 위함이에요. 내가 나아갈 방향을 잊지 않기 위해서.

소임 받을 때의 망설임은 나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법당 사람들이 다 총무를 쳐다볼 텐데 그걸 받아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아무도 할 사람이 없어서 받은 거지요.

정식으로 직함을 받고 나니 일이 더 수월하게 풀렸어요. 총무는 사람들 간의 소통을 담당하는 역할인데, 업무와 정보를 위에서 받을 때나 아래로 전달할 때 선이 명확히 그어지는 좋은 점이 있었어요. 의무만 있고 권한이 없는 자리가 대행이었다면, 이제 내 말에 씨알이 먹힌달까.

도반들의 성장에 감동하다

법당의 자랑거리는 역시 도반이에요. 도반들이 총무를 비슷하게 닮아 간다고 할까요. 약간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던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어요. 시스템의 변화가 용산법당에는 기회였지요. 발만 살짝 담그고 있던 사람들이 수행자이자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성장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총무 하면서 힘든 일은 별로 없었어요. 어려운 게 있다면 일감 나누기였지요. 부탁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감을 못 잡아서. 정말 신기한 게 도저히 시간이 없어 이정숙 도반에게 “회의에 참석해서 자리만 지켜달라” 고 부탁했는데, 세상에 이 도반이 일을 너무 잘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구나 싶을 정도로.

다른 용산법당 도반들도 알고 보니 모두 숨은 재능을 갖고 있더라구요. 다들 포커페이스야(웃음). 직장인이고 바쁘고 여유가 없는 걸 알아서 소임을 던졌을 때, 이렇게들 잘할 줄 생각도 못 한 거예요. 일감을 나누니 도반들의 진가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런 재미를 맛보기 시작한 게 일 년 반밖에 안 됐어요. 지금도 안타까워요. 코로나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용산법당에서 인재들을 더 많이 발굴할 수 있었을 텐데.

총무 소임하면서 확실하게 느꼈던 것이 “소임이 복이다” 예요. 그냥 똑같은 일 편한 일만 하면 자기 자신을 볼 기회가 없는데, 소임을 통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여러 프로그램을 접하면서 사람이 변하는 거예요. 제가 딱 그 예잖아요. ‘힘든 사람일수록 소임을 준다’는 얘기를 실감했어요. 저 사람이 지금 관점이 필요한 시기야, 싶으면 소임을 주고 싶은 거예요. 그것을 작년에서야 배웠어요.

더불어 일하는 기쁨

봉사 아무나 안 줘요. 일단 신뢰가 가는 사람, 같이 공부하면서 나아가고 싶은 사람. 소임을 받는다는 것은 도반들에게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거죠. 받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수행하기 위해 소임을 한다는 얘기를 처음에는 안 믿었어요. 그냥 일 중독자, 이렇게만 생각했거든요. 일하는 기쁨을 여기서 ‘처음’ 느낀 것 같아요. 예전에도 있었는데 감사한 줄은 몰랐던 거죠.

작년에는 정토에 오기 전에 같이 일했던 사람들을 찾아 고마움을 전했어요. 지난 일들을 부정해버리고 나는 항상 열심히 살았는데 하는 억울함만 가지고 계속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편을 부정하면 과거의 내 선택을 부정하고 아이 아빠를 부정하는 건데 그 애가 잘 될 수가 있겠나” 하는 법문과 일맥상통하지요.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을 위해서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어요.

이해와 공감 사이에서 저는 사람에 대한 눈치는 빠른데 이해가 잘 안 돼서 힘들었거든요.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득했어요. 상담도 많이 받아보고 여러 군데 돌아다녀 봤는데, 지도법사님 말씀에 다 있더라고요. 스님은 칼같이 치시는 게 있잖아요. 세게 말씀하셔서 그 큰 사랑을 잘 느끼지 못한 것 같아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내 삶이 편해지고 내가 나를 인정하게 된다는 것을 도반들을 통해서도 알게 되었어요. 한 분 한 분에 대해 마음으로 감사해요. 일단 좋은 사람들이잖아요. 나한테 가져갈 게 없는 사람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신기하지.

내가 눈물이 많은데, 눈물이 그냥 나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항상 너무 억울한 사람이었는데, 다들 나만 부려먹고(웃음). 친정 식구들도 시댁 식구들도. 딸, 며느리, 동생, 언니 역할만 하라 하고. 잠잘 시간도 없이 항상 뭔가를 떠밀려서 해내야 했어요. 그 가운데 중심이 없었기 때문에 힘들었지요. 도망가면 되고 피하면 되고 안 보면 되고 예전에는 그렇게 쉽게 생각했는데, 파도는 항상 있는 것이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더라고요.

파도가 몰려오면 서핑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지금 하는 서초의 일도 사람도 만만한 게 아니지만, 용산법당에서 배운 게 도움이 돼요. 이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면서 파도를 탈 것인가. 남편과의 관계도 내가 피하지 않고 파도타기를 하니까 상대방도 같이 파도를 타더라고요. 예전에는 남편의 요구가 들어오면 싫고 쳐내고 억울한 것도 많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괜찮아요. 아 이런 거구나. 감정을 덧바르지 않아도 같이 설 수 있는 공감대를 만들 수 있구나. 피곤하면 피곤하다 분명히 얘기하고. 예전에는 불안과 조바심 속에,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나 걱정이었다면 지금은 아주 편안해요. 많이 편해요.

남편이 놀라요. 정토회 와서 멋있어진 것 같다고. 자기 멋지다고. 나 원래 이런 사람이었거든! 웃으면서 얘기해요. 내가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아픔이 없었으면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나의 뒷배

후대사람에게 총무란 책임질 줄 아는 자세를 배우는 자리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실제로 책임지는 것은 별로 없어요. 소통의 한 고리일 뿐, 알고 보면 가벼워지는 자리가 총무 자리예요. 다 책임져줘요. 내가 못 지면 지원팀이 책임져 주고 법사님이 책임져 주고, 책임져 주는 사람이 되게 많아요. 솔직하기만 하면 돼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연결망이 생기고 그 안에서 든든해지니까요. 작은 소임을 하면 더 외로워질 수 있는데, 어느 정도 직급을 가지면 비빌 언덕이 계속 생겨요. 사는 동안 뒷배가 많으면 좋으니까. 정토회는 나에게 그런 ‘빽’ 이에요.

정토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기 원하는, 기본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에요. 스님도 “누구 한 사람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시잖아요. 스님이 제시하는 방향에 동조해서 스스로 발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흔들림도 있고 파도도 치고 부침이 있을지언정 포기하지 않는 귀함이 있는 거죠. 이 세상 수많은 사람 중에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만날까요. 이런 인연들이 함께하고 있는 정토회가 저는 참 좋아요.


글과 사진_이정민 희망리포터 (서울제주지부 마포지회)

정토행자의 하루팀이 알립니다.

안녕하세요? 정토행자의 하루팀입니다.
정토행자의 하루를 읽고 아침을 여는 정토행자님들에게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정토행자의 하루는 2014년 10월 13일을 시작으로 2,000명이 넘는 정토행자의 삶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행으로 하루하루를 만들어가는 정토행자의 삶에서 함께 웃고, 울었습니다.

그동안 정토행자의 삶을 우리에게 나눠준 봉사자는 각 지역의 희망리포터들입니다. 희망리포터가 수행에 귀감이 되는 정토행자를 찾아 인터뷰해서 편집자들과 함께 꾸준히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길어지고, 온라인 법당으로 바뀌면서 정토행자의 하루 주인공을 찾는데 많은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잘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정토회의 조직 개편으로 120여 명이던 희망리포터들이 현재 60여명으로 대폭 줄어, 정토행자의 하루 매일 발행이 어려워졌습니다.

지금 정토행자의 하루팀은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정토회 조직개편과 더불어 정토행자의 하루에도 변화를 가져올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고민을 구체적인 방안으로 현실화하기 위해 6월부터 당분간은 주 5일 발행이 아닌 주 3일(월,수,금) 발행을 하고자 합니다.

정토행자의 하루를 아끼는 여러분들의 많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전체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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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사트바

하나의 도식적인 논리나 지식의 도구로써 활용한느 것을 많이 봤습니다.
정토행자의 하루를 단순히 웹페이지의 하나가 아니고
형식을 다양화하고
유튜브 등의 매체로 확장하는건 어떨까요? ㅎㅎㅎ
너무 업무량을 늘리는 제안인가요. ㅎㅎ
아무튼 제작에 어려움을 겪드다고 하셔서 제 생각을 나열해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_()_

2021-06-19 14:21:17

보디사트바

정토회의 역사나 스토리 등과 엮어서 테마 주제로 각해보살님 등 과거 인물들을 다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끔식 스님의 법문이 교리적이나 형식적으로 다가올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정토 행자의 하루를 보면
아 이렇게 현실에 적용되는구나 하고 감동받을때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사람들도 약간은 스님의 법문을 어떤 깨달음의 체험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2021-06-19 14:17:12

보디사트바

저같은 경우에는 법사님들 수행기를 보면서 정말 많은 감동을 받고 반성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데 조금 세부적이지 못한것 같다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수행기나 인터뷰 등으로 중요 인물에 대해서는 더 클로즈업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2021-06-19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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