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정토행자의 하루
한 사람을 보는 세 가지 안경

오늘 정토행자의 하루는, 편집자 님이 전하는 일상에서의 '사소한 깨달음'입니다. 한방울의 물이 모이고 모여 바다를 이루듯, 한번의 알아차림들이 모여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가벼운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우린 어떤 색의 안경을 쓰고 있는가
▲ 우린 어떤 색의 안경을 쓰고 있는가

내 손님

"자기 손님이다."

20년 전, 남편이 내게 한 손님(A라고 하자)을 가리키며 했던 말이다.

"앗, 사장님 손님(A)오시네요."

10년 전, 직원이 했던 말이다. 그렇다. 이사를 가서도 우리 매장을 찾아주는 A 손님은 나만 상대할 수 있는 손님이다. 남편과 직원은 A 손님만 오면 슬쩍 자리를 비켰다. 그러나 나도 이젠 온몸으로 버겁다. 내 마음속에서는 열두 번도 더 ‘그냥 그 동네에서 사세요’라는 말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이 서리 콩 튀긴 거 딱딱해? 안 딱딱해? 이 반건조 오징어는 맛있어? 맛없어? 저 밑에 있는 걸로 꺼내 봐. 나 바빠. 빨리빨리 꺼내봐."

A 손님은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열 개, 스무 개를 다 뒤집는다. 물건 고르는 정성이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날도 역시나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튀긴 서리 콩 한 봉을 사기 위해 진열된 것들을 다 끄집어냈다.

"빨리 골라봐. 어떤 게 좋은 거야? 응? 빨리빨리 봐봐. 골라줘."

처음에는 내가 순진해서 A 손님의 말을 진심으로 듣고 물건을 정성껏 골라줬다. 그러나 나도 정토회 밥을 먹은 지 15년, 노련한 사람이다. 선택은 그 사람에게 맡길 뿐, 절대 골라주지 않는다. 내가 골라주면 다음번에 이 말을 들어야 한다.

“자기가 골라준 물건, 안 좋았어!”

그 여러 번의 경험이 나를 단련시켰다. 물건이 좋으냐 물어도, 맛있냐고 물어도, 내 대답은 똑같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다고.... 난 이렇게 A 손님 앞에만 서면 한결같은 사람이 된다.

또 시작이네

말이 길었다. 나를 한결같게 만드는 그 A 손님이 온 것이다. 사실 그 A 손님이 오면 살짝 기대하는 마음도 있다. ‘오늘은 내 마음에서 어떤 분별이 올라올까?’ 왜냐하면, A라는 손님에게 단 한 번도 분별심이 올라오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싫다, 좋다’라는 한 생각에 사로잡히지만 않으면 손님들을 대할 때 재밌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탐구로, 수행과제로, 삼기에 좋다. A 손님이 왔을 때, 가게에는 B 손님과 C 손님 두 명이 더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건을 헤집으며 고르고 또 고른다.

"콩이 갑상선 저하증에 나쁜 거 아냐? 나 갑상선 저하증이란 말이야." 그러면서 계속 튀긴 서리 콩을 다 꺼내서 뒤적거리다 겨우 하나를 선택했다. 봉지에 담아 달란다. 어짜피 차를 가지고 와서 그냥 들고가도 되는데 꼭 봉지를 찾는다.

보자기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손님
▲ 보자기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손님

우리 매장이 비닐 대신 보자기를 쓴 지 7년이 넘었다. 정토회 환경 담당이었던 한 도반의 권유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자기에 싸가는 것을 창피하다고 했던 손님들이 지금은 집에 있는 보자기까지 갖다주며 동참한다. 이렇게 최대한 비닐을 안 쓰려고 하지만 먼 곳에서 오는 손님의 경우는 비닐을 쓰기도 한다.

손님들이 챙겨다 준 보자기
▲ 손님들이 챙겨다 준 보자기

문제는 그 비닐봉투에서 시작했다. 카운터 안쪽에 비닐이 있다는 걸 아는 A손님은 손을 뻗어 비닐을 왕창 뜯는다. 말릴 틈도 없다. 자기 비닐 쓸 일 있다며 뜯어가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장이 아니라 묶음의 1/3 정도를...

‘아, 또 시작이네. 아니 어떻게 매번 올 때마다 저러냐. 한두 번도 아니고. 부끄럽지도 않나?’라고 내 입은 움찔움찔했고, 가슴은 불타는 용광로가 되었다. 이미 얼굴은 열이 올라 붉게 달아올랐다.

A 손님 : "나, 비닐 필요해. 빨리 더 줘. 멀리서 여기까지 오는데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지. 백화점은 서비스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아니, 그럼 그냥 백화점을 가세요! 뭐하러 기름값 아깝게 여기까지 와요?’라는 말이 곧 튀어나오는 걸 꾸역꾸역 삼키느라 체할 뻔했다. 그때 매장에 있던 B 손님이 A 손님의 비닐 뜯는 행동을 흘낏 봤다. 난 속으로 ‘아싸,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구나’를 생각하며 뿌듯했다. 이해받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내 편으로 굳히기 위해 나는 분별심을 잠시 버리고, 최대한 친절한 모습으로 A 손님을 보냈다. A 손님이 가고 B 손님이 내가 기다리던 말을 꺼냈다.

보자기로 된 장바구니
▲ 보자기로 된 장바구니

세 명의 다른 시선

"아니, 그 A 손님은 왜 마스크를 제대로 안 끼세요? 지난번에도 마스크를 턱에 걸치더니 오늘 또 그러시네. '마스크 똑바로 끼라'는 말이 여기까지(자신의 목을 가르키며) 올라왔는데 겨우 참았어요. 정말 타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안 하는 사람 같아요."

헉, 나는 몰랐다. A 손님이 마스크를 끼지 않았다는걸.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비닐 뜯어가는 행위를 같이 비난할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내가 보지도 못한 마스크 이야기다. 그때 B 손님이 다른 C 손님에게 묻는다.

B 손님 : "A 손님, 마스크 안 쓴 거 보셨죠?"
C 손님 : "마스크 안 썼어요? 저는 그건 못 보고, 갑상선 저하증이라길래 뭐 먹으면 좋은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요."
: “그럼 비닐 뜯어가는 것에는 마음이 안 불편했어요?"
C 손님 : "그냥 뭐, 독특하다는 정도?"

B와 C 손님과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이건 뭐지? 왜 다르지?'라며 잠시 멍했다. 그러다 우리 셋은 빵 터졌다. 우린 모두 각자가 쓰고 있던 안경의 색깔로 A 손님을 본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

‘옳고 그름이 없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나는 비닐 뜯어가는 것에 짜증 났지만, B 손님에게 그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되었다. 심지어 C 손님은 비닐뿐만 아니라 마스크까지도 문제가 안 되고, 자신이 궁금한 걸 물어보지 못한 아쉬움만 있을 뿐이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경험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서로 본 것이 다름에 재밌어했다.

: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우리가 지금 똑같은 상황을 봤는데 생각이 다 달라요. 내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왜 저 손님은 올 때마다 남의 물건을 공짜를 가져갈까, 걸렸거든요. 그래서 마스크는 전혀 눈에 안 들어왔어요.

B 손님 : 저는 사장님이랑 C 님이 A 님 마스크 안 쓴 걸 못 봤다는 게 더 놀라워요. 어떻게 못 보지, 싶어요. 제가 코로나로 사람들 마스크 안 쓰는 것에 엄청 민감하거든요. 그래서 그것만 제 눈에 보이네요. 다 저처럼 생각하는 줄 알았어요.

C 손님 : 제 딸이 갑상선 저하증이라는 진단이 나와서 A 님이 갑상선을 말하길래 귀가 번쩍했어요. 그래서 다른 행동은 안보였어요. 저는 어떻게 치료했는지 묻고 싶었는데 못 물어 아쉬워요.

이 경험은 또 한 번 내가 사물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내가 본 것이 꼭 옳은가를 되묻게 했다. 마스크를 안 쓴 겉모습도 제대로 못 본 내가 그 사람을 정확히 봤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스승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 백번 공감 가는 날이었다. 상대의 행동을 탓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살면 좋을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 지금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 분별을 안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내고도 알아차리고 돌아보는 힘. 어느새 수행자의 싹이 조금 자랐다.

글_권영숙(홍보시스템팀 정토행자의 하루)
편집_권영숙(홍보시스템팀 정토행자의 하루)

전체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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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바다

오...
그대는 깨어있는 수행자 이십니다.

2021-07-21 11:12:21

김정화

그렇군요. 정말 감동입니다. 나의 관심분야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보이죠.사람또한 마찬가지이구요. 오늘도 상대방에 대해 '그럴수도 있지'. 하고 바라보는 하루를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07-21 09:46:45

감로상

정말 감동이네요
생활속의 깨달음^^

2021-07-02 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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