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구미법당
사라진 법당 1호의 산증인

코로나로 인해 모든 법당 활동이 온라인으로 바뀌고, 개인 방이 모두 법당화되면서 사라진 법당 1호가 된 왜관법당의 산 증인 한옥주님. 침묵의 불도저(?)로 법당 개원부터 폐쇄까지 4년여를 시골의 불법 전도사로 각종 불사 및 행사를 빠지지 않고 진행하며 행복 전도사로서 수행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같은 인생 얘기, 온갖 풍파 헤치고 이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국화와 같은 한옥주님. 지금 이대로 더없이 행복하다는 그녀의 수행담을 들어보았습니다.

인터뷰하는 한옥주님
▲ 인터뷰하는 한옥주님

가시나는 공부시키지 마라!!

저는 대구 인근에서 1남 5녀인 딸 부잣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공직생활 일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셨고, 어머니는 가사와 과수원 농사 등 집안일 전반을 책임지고 도맡아 하시며 헌신하는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드시고 늦게 귀가하여 자고 있는 우리들을 깨워서 ‘가시나들 공부 시켜봐야 아무 소용없다’ ‘책을 불 질러 버려야지’라며 고함치시며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주무시는 것이 거의 일상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동네에서는 모두가 가난하여 자식들을 공부시키지 않았는데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딸들을 전문대학까지 보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불안한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마음에 상처가 많고, 나는 초라하다는 열등감을 항상 느끼며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생각하면 술 취한 아버지의 부정적 이미지만 떠올라 그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이런 기억과 경험들이 나의 무의식에 쌓여 부정적인 자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나마 대학까지 졸업하고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라 여겼습니다.

아도모례원 봉사, 오른쪽에서 세 번째
▲ 아도모례원 봉사, 오른쪽에서 세 번째

어깨가 무거운 맏며느리

고등학교 때 친구 어머니의 중매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은 2남 3녀의 장남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자상하고 잔정이 많고 경우가 바르시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며느리의 책임과 기대에 못 미치면 사정없이 질책하시고 못 마땅해하셨습니다. 시아버지는 본인의 안위밖에 모르시고 어른 대접 해주기만 바라시고, 시집살이하는 며느리를 이해하기보다는 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지적하고 꾸중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늘 어깨가 무겁고 힘들었으며, 그게 너무 싫고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온통 미움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며,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성당에 가서 영세도 받고, 이 절 저 절 수 없이 다니며 기도와 법문을 들었지만 미워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 이런 곳 정토회

그나마 남편은 언제나 나를 이해하고 내 입장이 되어 주었지만, 시부모님에 대한 미운 감정은 어쩌지 못했습니다. 지적이고 개성이 독특한 불자인 남편이 어느 해 여름휴가 때 영천 은해사 하계수련회를 갔다 오면서 정토지를 받아왔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2000년 7월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수련을 마치고 나 자신에 대해 깊이 돌아보게 되었고, 수련원을 내려오는 길에 향자재 법사님을 만나 대구까지 버스를 같이 타고 오면서 정토회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아! 이런 곳도 있구나’ 하며 며칠 후 궁금한 마음에 범어법당에 찾아갔습니다. 내킬 때마다 다니면서 법륜스님의 육조단경 강의를 들었는데 내용은 좋은데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고 상세하게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집전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여러가지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법당에서 기도 정진을 많이 했기에 매일 법당에 나가 사시예불, 금강경 독송, 300배 정진을 하니 마음도 안정이 되고 다른 봉사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환경담당을 맡았을 때 기존 활동가들의 화기애애한 회의광경을 보고 나도 저들처럼 실질적인 활동을 빨리 했으면 좋겠다는 조바심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내가 많이 변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문경수련원 앞줄 왼쪽 첫 번째
▲ 문경수련원 앞줄 왼쪽 첫 번째

새털같이 가벼워진 마음으로

어느 해인가 우리 집과 치매 걸린 시어머니 집, 두집을 보살피는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설이 지난 며칠 후 시아버지께서 전화로 “설에 먹고 남은 많은 강엿이 왜 없느냐? 너희들이 다 가져갔지?“하시며 가족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막말을 하시고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그 막말에 충격을 받아 괴로워 하다가 정초법회 때 법륜스님께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으로 질문을 하였는데, 답변이 너무 명쾌하여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아, 내 생각과 다르게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구나, 그런데 나는 내 입장에서 그 말의 의미만 크게 확대해서 움켜쥐고 괴로워하고 있었구나’ 하고 이해하니 바위에 억눌려 있던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공양간 소임으로 밥맛을 잃었던 나

그 뒤 공양간 소임을 맡게 되었는데 처음 하는 일이라 앞이 캄캄하고 마음이 무거워 밥맛을 잊어버릴 정도로 걱정이 되어 매일 가던 법당을 일주일간 나가지 않았습니다. 처음 하는 공양간 일인데 누구보다 잘하고 싶고 맛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만 앞서서 지레 걱정이 되어 법당을 못 나간 것이었습니다. 그때 총무가 전화로 집에 숨어있지만 말고 법당에 나와 무슨 이유인지를 이야기 해보라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심기일전하여 공양간 일을 서서히 익히며 봉사를 이어 갔습니다. 당시 법당에서는 행사가 유독 많았습니다. ‘100일 릴레이 거리 모금’, ‘미안하다 동포야’, ‘빈그릇 운동’등, 그리고 북한 동포 돕기 하면서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대구백화점 앞에서 ”반갑습니다!!“ 노래에 맞춰 율동도 하고, 문경수련원에서 하는 입재식에서도 공연을 준비하는 등 많은 일들을 가볍게 하며 보람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4월 초파일에는 도반들 각자가 나물 반찬을 한 가지씩 해 와서 공양간 준비도 함께하는 등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도반에 대한 고마움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미소가 그려집니다.

법사님 수계식 후 오른쪽
▲ 법사님 수계식 후 오른쪽

여러 종류의 복! 소임

그렇게 활동하고 있을 때 범어법당에서 지금의 수성법당으로 이전 불사를 하였습니다. 총무인 향자재법사님은 불사 책임을 맡고 나는 공양간을 맡았는데 많은 봉사자들과 함께 불사금 모금도 같이 진행하였습니다. 최대한 돈을 아끼기 위해 있는 건물 구조를 그대로 사용하다 보니 동선이 맞지 않아 많이 힘들었지만 어느 덧 법당이 완성되어 개원 하게 되었습니다. 공양간은 의외로 일이 많고 지원하는 봉사자도 적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힘들고 일거리는 많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개원 법회를 마치고 스님께서 봉사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때 공양간 일이 너무 힘들다고 울먹이는 내게 스님께서는 “그러면 내가 밥하까” 하시는데 그 말씀에 이제까지 불편하고 힘들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고 더없이 편안했습니다. 그 당시는 몰랐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누군가 내가 이렇게 힘든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분별심! 지나고 나면 내가 일으키는 것임을 돌이키다

수성법당은 접근성이 좋고 법당도 넓어서 각종 회의며 전국 행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개인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 법당에서 공양 준비를 했습니다. 6년 정도 공양간 소임을 하고, 교육팀장, 지원팀장 소임도 하게 되었는데 특히 지원팀은 각종 업무를 지원하는 일이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엄청 많았습니다. 그 후 총무 소임도 맡았지만, 그때마다 힘든 줄 모르고 그냥 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맡은 소임이 커지면서도 어려운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일했고 일하는 도중에 일어나는 분별심은 많았지만 끝나고 나면 내가 일으키는 것임을 알고 돌이킬 수 있어 마냥 좋았습니다. 수행이라는 긴장감보다는 봉사한다는 기쁨과 같이하는 도반의 따뜻한 마음이 있어 할 수 있었습니다. 공양간 소임도 지원팀장 소임도 기꺼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의 변화와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 관계에서 수줍어하고 말도 잘 못 하고 부끄러워하는 내가 조금 당당해지고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알아가는 힘이 생겨 소임이 복인 줄 다시 한번 느낍니다.

부처님 오신날 행사, 오른쪽 첫 번째
▲ 부처님 오신날 행사, 오른쪽 첫 번째

사라진 1호 법당 『왜관법당』

총무소임을 내려놓고 대경지부에서 활동하다가 남편의 정년퇴직으로 왜관으로 이사를 오면서 왜관법당 불사를 또 하였습니다. 적당한 법당을 찾아 여러 곳에 발품을 팔아야해서 힘들기도 했지만 또한 도반들의 많은 지원으로 원만하게 법당을 개원하고 총무소임을 맡아 그동안 갈고 닦은 봉사의 힘으로 열악했던 우리 지역 불교 포교의 기반을 닦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를 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내가 정토회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깊은 불심과 성실함으로 보이지 않게 뒷받침해 준 남편의 공이 컸습니다. 덕분에 수행과 정진으로 정신적 성장과 심리적 안정을 되찾아 더없이 행복합니다. 사실 저는 마음공부와 수행보다는 정토회에서 하는 일이 다 좋습니다. 특히 소임을 맡고 내려놓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무쌍한 마음을 보면서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소임을 맡으면 많은 일들 때문에 부담이 되어 힘들고, 소임이 없으면 서운함에 힘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얼마나 집착이 강한지도 알고 고집이 센 것도 알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딸의 해외활동 간담회, 앞줄 오른쪽 세 번째
▲ 딸의 해외활동 간담회, 앞줄 오른쪽 세 번째

나의 변화된 모습을 남들이 잘 모를지라도

그리고 내겐 꾸준함이라는 장점이 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지금은 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제가 대견하고 고맙습니다. 한편으로 나도 이렇게 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살고 있는데 주위에 나와 인연 있는 가까운 이들에게 이 법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안타깝기도 하지만 이 또한 세상이치임을 알고 있습니다. 나의 변화된 모습이 상대에게는 보이지 않나 봅니다. 친정 언니나 동생은 아예 관심이 없고, 남편은 적극적으로 지원은 하지만 법당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딸은 청년 활동부터 인도 수자타 봉사 등 나와 함께 부처님의 길을 가고 있어 참 다행입니다. 지금 내가 변한 것은 만나는 상대를 이해하고 나를 더 이상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됩니다. 예전에는 상대가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미워하고 말도 안하고 하였으나 지금은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이 조금 되었습니다. 아직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의견은 듣기 싫어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 공부 꺼리지만 곧바로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연습을 꾸준히 할 것입니다.

백년지기 남편과 일본여행중 한때
▲ 백년지기 남편과 일본여행중 한때

온라인 정토회와 함께 새로운 도약을

올해부터 코로나바이러스의 전파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비대면 생활방식으로 많은 불편과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이 있지만, 대의원 소임으로 삶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처음 산 노트북 사용법도 익히고 영상회의와 법회 등 많은 시간을 노트북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바뀐 정토회 활동의 새로운 도약과 개인적으로는 여여한 수행 정진으로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수행인으로 거듭나 이웃과 사회에 행복 전도사가 되리라 서원해봅니다.


한결같이 조용하고 무엇이든지 수용해주는 보살님의 뒷면에 이런 파노라마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일을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보살님의 수행담을 들으며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소임을 주면 뒤로 빼지 말고 무엇이든지 방긋방긋 웃으며 “예!!”하는 수행자가 되겠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일상이 바뀌었지만 매일 새벽 5시 기도로 하루를 여는 우리의 일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늘 또 하루 살아있어 행복한, 행복을 전하는 수행자로 살겠습니다.

글_전현숙(희망리포터 달서정토회 구미법당)
편집_이정선(진주정토회 진주법당)

전체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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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랭이

수행자의 법향이 느껴집니다.
고맙습니다~^^

2021-01-24 21:26:29

나부터

감사합니다.

2021-01-24 08:51:35

김몽돌

아름드리나무가 큰 그늘로 많은 사람들에게 쉼과 휴식을 주듯이 왜관법당의 거목이셨던 한옥주 보살님. 경전반 1년으로 왜관법당을 다녔던 저에게는 보살님보다 부총무님이란 호칭이 더 익숙합니다^^ 그때는 몰랐지만..지금 생각해보면 보살님과 같이 법당에서 활동한 것이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었고 행복했습니다. 고맙고 감사하고 항상 건강하세요!!

2021-01-24 08: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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