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동작법당
마음을 내어 놓으니

마음 출렁거림이 심해서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을 때 정토회에 찾아온 한미혜 님은 인생에서 뭔가 하려고 하면 불리한 상황이 반복되는 머피의 법칙처럼 한발 앞서 길이 막혔다고 합니다.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불교가 무었일까

어렸을 적 엄마가 절에 갈 때,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따라가서 밥만 먹었습니다. 결혼 후에는 시어머니가 절을 열심히 다녔는데 같이 가자고 하면 따라가 절을 했습니다. 절만 하는 것이 싫었는데 이상하게도 절에만 가면 그렇게 눈물이 났습니다. 왜 절을 하는지 의구심이 생겼고 어차피 다닐 것이라면 '절이 무엇이고 불교가 무엇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조계사를 찾아갔습니다.

조계사에서 하는 모든 것을 배우고 포교사 시험까지 통과했습니다. 포교사 생활로 어린이 법회만 10년을 했습니다. 그렇게 봉사도 하고 상도 많이 탔는데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이 법회 봉사를 많이 하면 자식이 생길 수 있다는 말에 열심히 했는데 그런 복이 제겐 오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나쁜 업식이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보며 어린이 법회에 대한 회의도 들었습니다. 그때 마음공부의 부족함도 절실히 느껴서 봉사활동을 그만두었습니다.

정토불교대학 홍보중(맨 앞)
▲ 정토불교대학 홍보중(맨 앞)

벼랑끝에 서다

포교원 일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던 마흔다섯 살때, 배가 너무 아파 병원을 갔는데 수술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2013년 말, 밤11~12시까지 직장에서 일하는 날이 잦았고, 사소한 일이 크게 확대되어 징계위원회로 발전하는 등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습니다. 2014년 설 연휴 전날부터 몸이 아파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바로 입원해서 수술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로 17일간 항생제 치료와 수술을 받았습니다. 2주 후에 나온 수술 결과 '난소암에 복막전이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청천병력이었습니다. '삶이 얼마 안 남았구나'하는 생각했습니다. 확실한 진단을 위해 2차 수술을 했는데 최종진단에서 난소암이 아닌 복막암이며 7개월의 항암치료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항암치료로 인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 몸의 털은 모두 빠졌고 온몸이 퉁퉁 부었습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화장실은 손, 발로 기어 손잡이를 잡고서야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남편은 요통으로 인해 실직이 길어 제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회사에서는 팀장의 심한 갑질과 많은 업무량에도 자존심이 세서 못하겠다는 말을 안했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하는 징계위까지 올라간 상황이 저를 벼랑 끝으로 밀었고 암진단까지 받은 상황이었습니다.

도반들과 행복한 회의 모둠 활동 중(왼쪽 두번째)
▲ 도반들과 행복한 회의 모둠 활동 중(왼쪽 두번째)

가난이 싫어

대학교 1학년 때 살던 아파트가 경매에 넘어가 하루아침에 길에 나앉았습니다. 대학 4년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졸업했습니다. 20대 중반에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진데다 흡인성 폐렴 합병증까지 와서 4개월간을 간병을 하며 어려움을 견뎠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20대 후반에 병원에 근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20대부터 너무 어렵게 살아서 빚, 대출이란 말만 들어도 경기가 일어날 정도로 싫었습니다. 남편의 실직은 가난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직장생활이 그토록 힘들어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무 자체가 지옥이었습니다. 스무 살 이후에는 용돈을 타 본 적이 없고 과외로 버는 돈은 다 엄마의 몫이 되어 참 싫었습니다. 가난이 싫어서 억척스럽게 살면서도 부모님께는 대출받아 전세도 얻어주고 생활기반을 마련해주었습니다.

결혼 전에 다시는 내게 돈을 달라거나 빌려달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엄마에게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빠에게는 돈을 절대 주지 말고 생활하라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10년쯤 지난 어느 날 엄마가 18개월 밀린 건강보험료 영수증을 보이며 대신 갚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통장의 돈은 오빠에게 다 주고 사업자등록증은 엄마 명의로 되어 있어 제 의료보험에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오빠가 엄마 것을 다 가져가고 의료보험비도 그렇게 밀려있는 것을 보니 부아가 치밀어 오빠와 엄마가 미웠습니다. 돈을 다 낸 뒤로는 속으로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차갑게 대했고 자주 보던 엄마도 2달 간격으로만 찾았습니다.

모둠활동 환경수업 중(맨 아랫줄 오른쪽)
▲ 모둠활동 환경수업 중(맨 아랫줄 오른쪽)

인연

출근하면서 즉문즉설 강연 현수막을 보면서 '사이비 종교단체인가' 생각하며 지나친 적이 있었습니다. 《답답하면 물어라》라는 책을 통해 스님을 처음 알았습니다. 내용이 저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마음이 너무 힘들었던 2013년에 유투브를 통해 지속적으로 즉문즉설을 찾아보았습니다.

스님의 영상을 700개쯤 보고 나니 의문이 들 때마다 스님이 하신 법문이 떠올랐고 위안을 받았습니다. 2014년 3월 2차 수술을 앞두고 용기를 내어 서초법당에 찾아갔고 법회 참석 후 108배를 하고 왔습니다. 수술 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관악구청 강당에서 열린 즉문즉설 강연도 참석하였습니다. 주소지를 따라 동작법당 수요법회에 한번 참석하고도 다닐까 말까를 고민했는데 2016년 선배 도반의 권유로 가을불교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일반 절에 다니던 사람이 이곳에 오면 바꾸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이곳 불교대학은 어떨까? 이곳 문화를 경험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하다 보니 유튜브의 내용과 불교대학의 공부가 같아 삶에 의문을 가졌던 것들이 저절로 풀렸습니다. ‘근본불교에 기반을 두고 부처님 시대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시는 것 같다. 아, 이게 다르구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많은 가르침이 가슴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경전반 입학식 날(뒷줄 오른쪽 두번째)
▲ 경전반 입학식 날(뒷줄 오른쪽 두번째)

배움의 기쁨

불교대학 수업 중 원자와 소립자 내용의 과학 얘기 법문에서는 귀에 쏙쏙 들어와서 법문 듣기가 행복했습니다. 공과대를 졸업했고 의학 공부를 해서 의식의 바탕 안에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원리를 풀어주는 법문이 좋았습니다. 불교대학 공부는 받아들이기 쉬웠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금강경1 수업도 좋았습니다. 쉬운 불교와 근본불교는 제가 추구하는 생활과 밀착되어 있어서 만족감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는 처음 절에 갔을 때 사람들이 빽빽이 앉아 반야심경2을 외우고 한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들을 줄줄줄 말하는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저것이 무얼까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 원리를 알게 되니 궁금증이 풀려 속이 시원했습니다.

법문을 들으며 공부하다 보니 자존심이 세서 자학을 많이 하는 나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아, 나는 거기까지 가지 못하는 것이 내 모습이구나, 꼭 가지 않아도 되는구나.’를 알았습니다. 자신감이 생겼고 한 생각 돌이키니 특별히 어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회사에서 주눅 들어 하고 싶은 말을 제때 못 할 때에도 ‘못할 수도 있고 못해도 괜찮구나.’를 알았습니다.

불교대학 홍보 중(맨 오른쪽)
▲ 불교대학 홍보 중(맨 오른쪽)

같이 살아줘서 고마워

경전반에 올라오면서 불교대학 담당자 제안을 받았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다녀와서 돌아가신 엄마에게 불같이 화낸 지난날을 맑게 씻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닿기까지 한 뼘도 안되었는데 어쩌면 그토록 멀었는지 아득합니다.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도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결혼해서 남편 덕 보려고 했는데 신혼 3년을 제외하고 아프다며 지금까지도 직장을 안 다니고 있는 남편... 저는 제가 '말은 안 했다'고 생각했지만 자주 싸웠고, 헤어질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며 괴로웠습니다.

그런 저를 보면서 같은 시간을 공유한 남편에게 고맙다는 제목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당신도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절로 일어났고 ‘이런 나와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능력도, 실력도 있고 인물도 빠지지 않은 남편에게 ‘저 사람이 왜 저거 밖에 못하나?’ 원망했는데 지금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같이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이 진심임을 고백합니다. 직장을 다니든 안 다니든 이렇게 제 곁에 있어 줘서 고맙고 이만한 건강을 지키고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가슴에서 우러납니다.

이제는 속으로만 삼키며 삭히던 말을 내어 놓기도 하고 세상일이 그러려니 합니다. 시간이 지나니까 저절로 가라앉는 것도 있고 상황을 찬찬히 바라보기도 합니다. 미쳐 날뛴다는 말을 하지 못했는데 이런 말도 이젠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말로 할 수 있는 건 이미 풀린 것임을 알게 되기까지 말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상담도 받았었습니다. '풀리지 않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다' 하면서 말을 안 했던 것은 '내 생각'이었음을 이제는 압니다.

JTS 거리모금 활동 중(왼쪽)
▲ JTS 거리모금 활동 중(왼쪽)

모든 것은 내가 만든 것

법당 일을 하면서 아직도 분별심이 많지만 곧 바로 ‘예’ 합니다. 직장에서도 제가 투명 벽을 치고 있어서 스스럼없이 다가오지 못하며 지적질이 많은 저를 싫어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게 다 괜찮아.’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많이 부드럽고, 제 자신에게도 너그러워졌습니다. 그렇게 갑질하던 상사는 직원들의 문제 제기로 복직 후 1년 만에 스스로 그만두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간다'는 말이 뭔지를 깨달았습니다. 직장 상사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음에 완벽하려 애쓰다 보니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지금 상사와의 관계는 반대입니다. 잘하려 애쓰지 않고, 모르는 것은 솔직히 모른다고 하며, 상대를 인정하고, 고마운 마음을 드러내니 어느 날 직장이 가벼워졌습니다.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복막전이가 아니라 복막암이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병가와 휴직으로 쉬면서 오롯이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좋았습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그 힘든 날들을 팔자려니 했는데 그것도 내가 만든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의 장3>에서 엄마와 비껴간 시간을 두고 때늦은 참회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라서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어 더 애통했는데 이젠 엄마에게 미움은 없고 감사한 마음만 남았습니다.


법당 확장불사를 정해놓고 새벽기도를 20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진한 한미혜 님은 해야 한다고 마음을 정하면 끝까지 한다고 합니다. 결혼 23년차 직장인으로서 한국사회의 며느리가 가지는 시댁과의 불화는 ‘그러려니’ 하며 뱃장이 두둑해졌다는데요. 경전반 꼭지와, 모둠장, 봄불교대학 꼭지 등의 소임을 이어오면서도 내어 놓을 것이 없다던 한미혜 님의 웃는 얼굴이 달처럼 환합니다. 각진 것들이 동글동글해서 살기가 편해졌다는데 리포터는 몸만 동그래졌다고 해서 같이 웃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글_강경자 희망리포터(양천정토회 동작법당)
편집_정지혜(해운대정토회 반여법당)


  1. 금강경대승불교 경전의 하나 

  2. 반야심경대승경전의 하나 

  3. 깨달음의 장 4박 5일 기간의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평생에 한 번만 참여할 수 있음. 

전체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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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왕

미혜님, 내어주신 진솔한 삶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굴곡진 삶의 터널을 잘 지나오신 미혜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2020-12-28 07:50:12

박신영

업식은 녹이면 삶이 가벼워지고 행복해진다는 한미혜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2020-12-24 06:21:26

금강화

감사합니다

2020-12-22 12: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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