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여수법당
내가 경험한 무상과 무아!

이 글은 2020년 10월 <전세계 수행자랑>에 제출된 글 중 하나인 신규호 님의 나누기입니다. <전세계 수행자랑>은 코로나 시대 법당도 못 가고, 도반도 못 만나니, 글로 나누기라도 좀 대대적으로 해보자고 기획한 온라인 행사였습니다. 이 자리에 자신의 수행을 글로 한번 정리하고, 또 다른 도반들과 나누고 싶었던 여러분들이 참여해 주셨고, 오늘은 그중 하나인 신규호 님의 글을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글로 하는 나누기. 시작!

이 컵은 언젠가는 깨어지도록 정해져 있다!
▲ 이 컵은 언젠가는 깨어지도록 정해져 있다!

무상; 이 컵은 언젠가는 깨어지도록 정해져 있다

어제 아침에 그릇을 씻으면서 도자기 그릇 한 개를 선반에 살짝 불안하게 올려놓았는데 그게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깨졌습니다. 특히 아침에 그릇이나 병, 기타 유리 같은 것이 깨지면 언제나 좋지 않은 일이 생겼기에 걱정이 됐습니다. 오늘 회사 가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오늘은 가능한 아무것도 안 하고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일어날 일이 안 생길 것도 아니고, 몇 가지 상상을 해 보았지만 받아들여야지 뭐 어떻게 하겠어.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릇 깨진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우리는 깨지지 않는 그릇을 항상 보면서 깨지지 않는 그릇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릇은 언젠가는 깨지게 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 기간이 다음 순간이든지 아니면 100년 후든지, 짧든지 길든지 간에.

’모든 것은 변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물건들, 건물들, 인테리어, 그리고 사람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변하고 깨어지고 없어지고 죽게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애써 외면하면서 살고 있죠.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삽니다. 불교대학에서 배웠던 무상이라는 의미를 조금 더 체험적으로 알게 된 어제 아침이었습니다.
2019.3.21(목)

주인공인 신규호 님
▲ 주인공인 신규호 님

무아;

이것들이 왜 이래?

몇 년 전입니다. 조카가 경북 구미시에서 그날, 일요일 12시에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구미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으나 우리 가족이 사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에서 3시간은 걸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작은아버지고 작은 엄마인 위치이므로 1시간 정도는 미리 먼저 가야 할 것 같아 전날 집사람, 딸, 아들 세 사람에게 아침 8시에 출발할 것이라고 통보하고 수긍을 받았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가족 모두가 결혼 당사자인 조카를 예뻐하지 않아서인지 출발 시간인 아침 8시가 되었는데, 저만 준비가 되어 있고 나머지 세 명은 아직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아직 여유가 있으니 그냥 놔두었습니다. 8시 30분이 되었습니다. 세 명 모두 아직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합니다. 이것들이 왜 이래? 그래도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1시간 전에 도착하면 좋겠지만 제시간에 가도 되기는 할 것 같습니다.

8시에 출발하기로 했잖아?

9시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세 명 다 침대에 누워 자고 있습니다. 화가 올라옵니다. 이것들이 어떻게 하려고 이러고 있어, 화가 나니 깨우기도 싫어집니다. 참고로 딸 아들은 애들이 아닙니다. 20살은 훨씬 넘었습니다. 9시 10분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젤 만만한 집사람에게 소리쳤습니다. ‘8시에 출발하기로 했잖아? 지금 몇 시야?’ 그때야 꾸물꾸물 일어납니다.

그리고 행동이 세월아 네월아 서두는 기색이 없습니다. 화가 올라왔습니다. 좀 큰 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8시에 출발하기로 약속했잖아, 지금 몇 시야 근데 그러고 있어?" 좀 미안한 듯이 대답했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돌아온 대답은 "왜 큰소리치고 그래, 가기만 하면 되지"하며 짜증스러운 답이 되돌아왔습니다.

문경특강수련 참가중에 한 컷
▲ 문경특강수련 참가중에 한 컷

뚜껑이 열렸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근 1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화를 낸 것이요. 뚜껑이 열렸습니다. 화가 폭발하여 막 큰소리, 악을 썼습니다. 그러고 나니 너무 괴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집이 2층밖에 안 되어 뛰어내려 봐야 부상만 입고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10층 이상에서만 살았으면 진짜 뛰어내렸을 텐데 이런 집에서 살아서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다행히 정토불교대학 다니면서 배운 최고의 소득인 ‘알아차리기’ 연습을 하는 중이라서 화가 약간은 가라앉아 거의 10시쯤에는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고집이 세서인지 한번 화가 많이 나면 정말 오래 갔습니다. 가끔 해외 토픽에 가족 간에 크게 다툰 후 40년, 50년 한집에 살면서도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대화하지 않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 기사를 보면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별거 아니네’라고 혼자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한두 달 정도는 말없이 냉랭한 상태로 가볍게 지낼 수 있지만, 많이 양보해서 그래도 최소 일주일은 지나야 풀리곤 했습니다.

10시간 전의 죽고 싶은 마음은 어디 갔지?

출발하고 1시간 후쯤에는 화의 잔재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거의 정상이 되었습니다. 알아차리기 연습의 결과입니다. 속도를 막 내서 예식이 끝나기 전에 겨우 도착하여 그럭저럭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한 것으로 예식을 마쳤습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 웃고 떠들다 보니 출발하기 전의 기분은 사라졌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대학 다니는 아들의 1학기 성적이 확인되었는데 대단히 높은 학점으로 장학금 받는 것이 당연한 성적이었습니다. 기분이 완전히 풀렸습니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샤워하고 거실에 이불을 덮고 누워 TV를 비몽사몽간 보고 있으려니, 적당한 피로감에 포근한 이불 속에 있으니 행복감이 느껴졌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가만! 10시간 전만 해도 너무 불행하고 괴로운 마음이 들어 살고 싶은 생각 없었는데? 여기가 10층만 됐어도 진짜 뛰어내렸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이렇게 행복한 마음이 든다고?

도반들과 행복한 회의 중에(맨 오른쪽)
▲ 도반들과 행복한 회의 중에(맨 오른쪽)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나라 할 것 없네

똑같은 장소에서 아침과 저녁 10시간 간격 사이 극과 극의 감정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습니다. 아침의 살고 싶지 않은, 베란다에서 뛰어 내려 죽고 싶은 감정과 마음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확실한 진실한 마음이었습니다. 조금 전 샤워하고 적당한 피로감 속에서 이불 덮고 포근한 지금의 행복감은 거짓일 수 없는 느낌입니다. 그 순간 느낌은 아무리 극과 극이지만 모순도 없고 착각도 아닌 확실한 진짜였습니다.

아! 인간이 나라고 동일시하는 감정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너무 쉽게 변합니다. 아무리 그 순간에는 진실이지만 다음 순간이나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똑 같지가 않습니다. 변합니다. 반대로 변했다 할지라도 그 변한 그 감정 또한 진실입니다. 모든 순간순간 감정과 마음은 진실하지만 계속하여 끝없이 변합니다. 계속하여 변하니 그 순간의 감정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나라고 동일 시 하는 감정이 계속 변하니 어떤 감정이 진짜 내 감정인지 확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무아입니다. 이 경험은 지금도 제게 영향을 미치고 앞으로도 계속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격렬한 감정에 휩싸일 때 저 순간을 기억합니다. ‘이 격렬한 무엇으로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이 감정 이 생각도 틀림없이 바뀐다.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냉정을 찾기 쉬워집니다.
2019.03.25(월)

천일결사 입재식에서 도반들과(맨 오른쪽 신규호 님)
▲ 천일결사 입재식에서 도반들과(맨 오른쪽 신규호 님)

변화의 시작과 끝, 알아차림

저는 2014년 가을불교대학에 입학하면서 불교와 정토회에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 전에는 불교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법륜스님이나 스님의 즉문즉설에 대해서도 몰랐습니다. 친한 친구의 입학 권유에 나쁜 거 하라하겠어, 이 기회에 불교에 대해 전혀 모르니 불교에 대한 상식이나 넓히지 뭐 이런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시작하면 어느 정도는 끝을 보는 습관 같은 것이 있어 그 동안 불교대학 담당 소임도 하고, 희망리포터 소임도 맡으면서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불교대학 첫 강의 시간에 배운 무상과 무아라는 것은 도무지 너무나도 어려운 개념이었습니다. 해석할 수도 풀 수도 없는 막막한 문제였으며 무엇인가를 자극하는 특별한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머리 한 곳에 자리 잡아 버렸습니다.

위에 기술했다시피 전 고집이 세서 한번 화가 나면 정말 오래 갔었습니다. 요즘은 화가 난 저를 알아차리면 대부분 금방 사그라져 버립니다. 알아차리기를 배우지 못했다면 몇 년 전의 저 나름의 깨우침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빨라도 일주일 후에나 화가 좀 풀렸을 테니까요. 감사한 마음입니다. 지금 저는 부처님의 제자임이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제 인생의 주인이 되어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나는 행복한 수행자입니다. 앞으로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글_ 신규호 희망리포터(광주정토회 여수법당)
편집_ 이종명(전주정토회 전주법당)

전체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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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호

그러면 색즉시공에서 모든 것이 공이니 그러면 나의 존재가 나의 감정이 없는 없었던 것이냐?나의 몸이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고 나의 감정이 이렇게 생생한데도?

그러니 공즉시색인 것이죠.
공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나 허가 아닙니다.

2022-08-30 11:43:59

신규호

순간 순간의 감정은 진실하지만 끊임 없이 변합니다.
자아 또는 나로 인식하는 감정은 순간적으로 완전히 반대로도 변합니다. 지나 놓고 보면 모순일 진정 그 순간 만큼은 진실합니다. 그래서 무아인 것이죠. 아 라고 특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색즉시공입니다.

2022-08-30 11:33:27

신규호

글쓴이 입니다.
시간이 흘러 무상과 무아에 대해 새로운 작은 깨달음이 있어
보관하고 싶고 나누기도 하고 싶어 찾았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용어라 가끔 코미디적이 용도로도 쓰입니다.

2022-08-30 11: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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