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경산법당
나는야, 달팽이 수행자!

수성정토회 경산법당 김숙이 님은 모둠장으로 활동하면서 경산법당 구석구석을 살피며 법당 살림을 꾸리고 있습니다. 수줍은 미소를 띠며 자신은 달팽이 수행자라고 말하는 김숙이 님을 소개합니다.

하루아침에 남의 집 살이로

저는 경북 청도에서 4남 1녀의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300가구 가량 살고 있는 마을에서 땅도 있고 성실하신 아버지 덕분에 어려움 없이 자랐습니다. 친구들이 농사일 돕느라 바쁠 때, 저는 놀러 다니느라 바빴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둘째 오빠가 경산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밥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오빠의 밥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밥을 태우고 제대로 된 밥을 했던 기억은 없지만, 힘들기보다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을 즐겼습니다.

정토불교대학 졸업식(앞줄, 오른쪽에서 첫번째)
▲ 정토불교대학 졸업식(앞줄, 오른쪽에서 첫번째)

그러나 경산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하나 뿐인 딸이라고 저를 무척 예뻐하시던 아버지였습니다. 든든한 가장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공부 욕심이 있었던 저는, 아는 분의 소개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는 말에 남의 집 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빠에게 밥해 주려고 경산에 왔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약속과 다르게 저는 더 이상 학교에 가지 못했고, 그때부터 공부에 대한 갈증은 열등감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남동생이 청도에서 나와 함께 살면서, 저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계속된 가장의 책임

대우가 좋았던 제일모직 방직공장에 취직하려고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기계를 놓는 선반의 높이에 못 미쳤던지, 저의 키가 1cm 모자란다고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규모가 좀 작은, 다른 공장에 취직했는데 그 때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잘생기고 말을 잘하고 상냥했습니다. 남편의 똑똑한 말솜씨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학업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또한, 가족의 사랑에 갈증이 있었던 저에게 남편의 말은 달콤하기까지 했습니다.

얼마 뒤 저는 행복을 꿈꾸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저에게만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술, 도박, 여자, 폭력... 이 중 하나만으로도 가정이 위태할 텐데 남편은 종합세트였습니다. 당장 내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에도 남편은 차를 몰고 다녔습니다. 남편의 과시욕 덕분에 여자 운전자가 귀할 때지만 저는 운전을 했습니다. 제가 운전하는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려고, 남편은 술을 마시면 저를 부르곤 했습니다.

딸 셋을 낳아서 식구가 늘어났지만, 여전한 남편의 모습에 지쳐갔고 자주 다투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보다 저의 화를 남편에게 쏟아내기에 바빴습니다. 남편은 아들이 없어서 섭섭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했습니다. ‘아들이 있으면 달라지려나?’하는 마음으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도 남편은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는 남편 덕을 보려고 했었습니다. 싸우거나 참는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우여곡절 끝에 남편과는 서류정리를 했습니다. 덕 보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편안했습니다.

경전반 입학식(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 경전반 입학식(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아들에게서 독립하려고 불교대학에 입학!

2015년, 안산에서 살 때 서울에 사는 큰 딸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삶이 지치고 힘든 저에게 스님의 말씀은 갈증을 해소시키는 단비 같았습니다. 자식이 스무 살이 넘으면 독립시켜야 한다는 스님의 단호한 말씀에 ‘그렇지!’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무 살이 넘은 자식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려 힘들어하는 저를 응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해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저는 아들을 돌보느라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합의금으로 받은 돈의 일부를 생활비로 사용하자고 이야기했을 때, 아들은 “엄마가 왜 그 돈을 써?”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당황스럽고, 부끄럽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식이 스무 살이 넘으면 독립시켜야 한다는 스님 말씀을 제 편한 데로 들었다가, 상황이 바뀌니 자식에게 의지하려는 저를 깨닫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때 우연히 정토불교대학 홍보 현수막을 보고 ‘아! 저거다’하며 2016년 봄, 안산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 반 수업을 들었습니다. 배움에 목말라 있었던 저는 성실히 수업에 출석했습니다. 법문은 어려웠고 마음나누기 할 때는 벌벌 떨렸습니다. 그래도 뭐 하나라도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담당자가 하라는 것은 모두 했습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깨달음의 장1〉을 다녀왔습니다. 자신을 돌아볼 겨를 없이 살았던 저에게 〈깨달음의 장〉은 저를 찾아가는 여행이었습니다. 저의 삶은 저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원망스럽기만 했던 남편이었는데, 그가 아니었으면 네 명의 아이 엄마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30년 동안 어두웠던 동굴에 한 줄기 빛이 드는 것처럼 눈이 부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둘째 딸 가족과 함께(오른쪽 첫번째)
▲ 둘째 딸 가족과 함께(오른쪽 첫번째)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직후, 경산에 사는 둘째 딸이 아이를 낳아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2017년 경산법당 경전반에 등록했습니다. 학원에서 근무하는 딸의 퇴근시간은 늦었고, 사위가 퇴근을 하면 법당에 갔습니다. 손녀를 업고 법당에 가야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수업 받는 동안 저녁 팀장이 제 손녀를 업고 법당 밖을 서성였습니다. 깨달음은 더디게 오는데 시간은 참 빨리 갔습니다. 법당에 업고 다녔던 그 손녀는 지금은 다섯 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닙니다.

저는 딸에게 월급을 받는 외손녀의 베이비시터입니다. “엄마에게 주는 월급이 아깝다고 생각되거든 언제든지 말을 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들에게서 마음의 독립을 하고 싶어 발을 들이게 된 정토회에서, 저는 서서히 당당하게 자립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친구야, 너도 할 수 있어!

저에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즐거움도 어려움도 함께 나눈 친구입니다. 제가 어려울 때 그 친구는 기꺼이 도움을 주고, 그 친구가 힘들 때는 제가 발 벗고 나섭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정토불교대학을 소개했습니다. 그 친구는 마음 나누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면서도 경전반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의 장〉은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거리등 설치 준비
▲ 거리등 설치 준비

친구는 저에게 “너는 잘 하잖아”라고 말하곤 합니다.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저에게 오랜 친구가 “너는 잘 하잖아”라는 말을 처음 했을 때 얼떨떨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정토회가 저를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음나누기를 힘들어하는 친구는 〈깨달음의 장〉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두려움이 커 보였습니다. 모르면 묻고, 안 되면 다시 하는 저의 모습이 그 친구 눈에는 잘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더니, 친구의 그 말은 그 어떤 점검보다 저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처음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 도반들의 학력이 높아서 놀랐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저는 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여자친구 10명 중 2명만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머지는 진학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정토회 활동은 저의 오래된 배움의 갈망을 자극하고 격려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통과했고, 이젠 대학교도 도전해 보려 합니다.

저는 반야심경2을 다 외우는데 3년이 걸렸습니다. 〈명상수련〉을 할 때는 다리에 쥐가 나고 답답해서 뛰쳐나오고 싶었습니다. ‘다시는 〈명상수련〉을 오나 봐라’하고 다짐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끊어질듯 한 다리는 멀쩡했습니다. 지금은 법당 근처로 이사 와서 아침마다 법당에서 기도합니다. “친구야 너도 할 수 있어!”

경전반 수련회(앞줄, 가운데)
▲ 경전반 수련회(앞줄, 가운데)

모자이크 붓다의 한 점이 되리라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일하고 있고, 주머니에 쓸 수 있는 돈이 있다는 것이 든든합니다. 매일 아침 법당에서 기도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모르는 건 가르쳐 주는 도반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남들이 1년이면 할 것을 3년 걸려서라도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여유로워집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내 키가 1cm만 더 컸더라면,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땐 저의 괴로움을 남 탓으로 돌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내 탓이요’하며 반성하고,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고 저 자신을 위로합니다. 안 되면 다시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또 다시 하면 됩니다. 비록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히 행복을 전하는 수행자가 되겠습니다. 모자이크 붓다의 한 점이 되겠습니다.

통일의병대회(오른쪽 첫번째)
▲ 통일의병대회(오른쪽 첫번째)


쉼 없이 수행자의 길을 닦고 계신 김숙이 님!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용기가 생깁니다. 김숙이 님께 응원과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글_김정림_희망리포터(수성정토회_경산법당)
편집_성지연(서초정토회_서초법당)


  1. 깨달음의 장 4박 5일 기간의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2. 반야심경 대승경전의 하나 

전체댓글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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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하시고 대단하십니다. 응원합니다.

2020-08-06 13:17:35

박혜진

정말 모든 이의 귀감이 되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 따뜻한 마음이 와닿았습니다. 고맙습니다.

2020-07-25 01:28:28

김용태

모르면 묻고 안되면 다시하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7-24 09:4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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