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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어머니가 제게 법륜스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정토불교대학에 다녔고 아직도 108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경기도에 살고 있던 저는 주변 정토회를 찾아 전화해보았으나 인연으로 연결되지는 못했습니다.
경기도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결혼했습니다. 결혼생활은 말도 못 할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결혼 후 사업을 시작한 남편은 쫄딱 망했고, 2016년 우리 가족은 경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아르바이트하러 영천으로 오가는 길에 우연히 시청오거리에서 색 바랜 정토회 간판을 보았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마침 다음 주가 불교대학 입학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절인연 따라 2017년 영천법당 봄불교대학 주간반의 유일한 입학생이 되었습니다.
부총무 님과 불교대학 담당자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에 무사히 불교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일한 주간반 학생이다 보니 중요한 수업공지를 놓치는 등 우여곡절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경전반 진학을 앞두고 한가지 꾀를 내었습니다. ‘나오는 사람이 없다 해도 나 혼자 법문을 마음 편하게 들으려면 더러워서라도 내가 담당을 해야겠다!’ 하며 경전반 담당을 맡았습니다.
불교대학 다닐 때 어쩌다 혼자 수업을 듣게 되면 담당자에게 미안하고 마음이 불편했는데, 담당이 되니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그 때 경전반 학생이 저까지 다섯 명이었는데 다른 학생들이 나오든지 말든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재미있게 다녔습니다. 경전반 동기 도반들은 현재도 함께 활동하며 제일 크게 힘이 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고마운 도반들, 그때를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기도 합니다.
경전반 담당을 수월히 하고 나니 불교대학 담당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경전반 졸업까지 〈깨달음의 장〉1에 가지 않은 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법당에서 활동할수록 〈깨달음의 장〉에 다녀오지 않은 것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희망리포터 교육을 가도, 경전반 담당자 교육을 가도, 심지어 법당에서 회의를 하는데도 〈깨달음의 장〉 이수 여부를 물었습니다.
당시 경전반 졸업을 앞둔 때라 마음에 괴로움이 많지 않았습니다. 불교대학 〈수행맛보기〉 때부터 시작한 108배를 하루도 놓치지 않고 하고 있어서인지 거의 화가 나지 않는 상태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장〉에 가도 크게 얻을 것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의 장〉을 가지 않은 유일한 동기 도반이 드디어 가게 되었습니다. 두 명이면 버텨볼 만한데 불교대학 담당까지 맡은 마당에 혼자 안 가고 버티기가 정말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더러워서 간다.’라며 결국 신청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간 〈깨달음의 장〉에서 제가 바가지를 거꾸로 덮어쓰고 있는 줄을 확연히 알고 왔습니다.
제가 만들어 놓은 가족 울타리에는 친정엄마와 딸이 전부였습니다. 남편은 제 가족이 아니었으니, 남편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깨달음의 장〉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 남편을 보는 순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마주치면 꺼이꺼이 울 것 같아 화장실에 숨어서 울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폭탄처럼 화를 퍼부어 대는 저와 같이 살아준 남편, 생각해보니 부처님이 따로 없었습니다. 왜 그러냐는 남편에게 '나도 몰랐는데 사실은 내가 당신한테 많이 의지했나봐. 그래서 화내고 정신병자처럼 굴었어. 그걸 이제야 알았어.' 라며 사실대로 이야기했습니다. 남편은 '돌았나?' 하며 넘겼지만, 속마음으로 '알아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뒤로는 무슨 말을 해도 싸움이 되질 않았습니다.
저는 모든 걸 거꾸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날 등쳐먹으려고 결혼했다, 악질이다, 내 재산을 알고 계획적으로 만났다, 시집식구들과 한통속이다.’ 또 ‘너 만나서 내 집 날렸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산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이렇게 괴롭지 않았다. 네가 감히 어떻게 나를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느냐?’ 하며 원망했습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 결혼 초 5 년간은 생지옥이었습니다. 세상에 저보다 괴로운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이가 절 부설 유치원을 가면서 봉사도 하고 절을 하며 남편에 대한 일차적인 원망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너를 용서해 주겠다.’는 마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수행맛보기〉 때 했던 ‘나도 틀릴 수 있고 너도 옳을 수 있다.’는 공부는 제일 어려웠습니다. 남편이 옳다는 생각을 내는 순간부터 억울해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수행하며 몇 달이 지나자 어느 날 남편의 말을 들으며 ‘그래 그 말도 옳을 수 있겠다’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움은 조금씩 사그라졌습니다. 남편만 보면 올라오던 화도 없어지고 싸우는 일도 줄었습니다. 화가 나면 기도는 더 잘되었습니다. 108배를 하며 제가 또 어디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행맛보기〉를 시작한지 3년, 시간은 못 지켜도 기도를 놓치는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저는 동기 중에 정회원도 제일 늦게 되었고, 〈깨달음의 장〉도 제일 늦게 갔습니다. 그런데 작년 12월 부총무 소임이 주어졌습니다.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본격적으로 정토회 활동을 하려고 했는데 예고도 없이 큰 소임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초 순회법회 때 묘당법사님께 ‘부총무 맡을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되었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법사님의 대답은 ‘본인이 결정하라.’였습니다.
‘결정을 못 해서 물어 본 건데 나보고 결정을 하라니......’ 조금 당황했습니다. 아마도 질문을 하며 ‘부총무를 맡으면 남들보다 수행이 더 된다, 다른 이를 위해 시간을 쓰니 복 짓는 일이다.’라는 식의 위로를 기대했나 봅니다. 법사님은 멀뚱히 서있는 저에게 “어떻게 할 거냐?” 물으셨습니다. 한참 뒤, 저는 제 입으로 “한다!”고 말해버렸습니다.
위로의 말을 들었다면 마음 한구석에 다른 이들이 원해서 한다는 생각이 남아있어 조금만 힘들어도 상대를 원망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 결정이기에 일을 하며 일어나는 분별심에도 스스로 답을 찾아냅니다. 법사님이 원망이 많은 저를 알아보셨나 봅니다. 그 뒤로 제 일은 제가 결정합니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 결정하는 것, 그것은 참 멋지고 마음 편한 일입니다. 그러니 남편이 뭐라고 해도 주눅이 들지 않습니다. 남편이 제 인생을 책임지지도, 대신 살아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 섭섭하다는 그 마음은 받아줍니다.
더러워서 했다지만 어쨌건 했기 때문에 저는 마음의 장애를 이겨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소임을 복으로 받았나 싶기도 합니다. 우리 아이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저처럼 해버리는 힘을 기르길 바랍니다.
작은 소임에도 책임감을 가지고 꾸준히 수행하신 정수옥 님은 도반들의 귀감입니다. 저도 큰 일 작은 일 구분하지 않고 어떤 소임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경험담을 솔직하게 나누어주신 정수옥 님 감사드립니다.
글_김경미 희망리포터(경주정토회 영천법당)
편집_허란희(용인정토회 용인법당)
깨달음의 장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4박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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