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서산법당
내가 깨지고 나니, 거기에 꽤 괜찮은 내가 있었다!

2015년에 개원한 신생 법당인 서산법당에는 경전반 학생 신분으로 부총무까지 맡은 참 신기한 도반이 있습니다. 낮에는 직장 일, 저녁에는 법당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텐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항상 싱글벙글합니다. 얼마 전에는 서원 행자에 전국대의원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정말 할 만한 이야기가 없다며 희망리포터를 곤란하게 만든 백현희 님. 일반인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녀의 행동 뒤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맑고 순수한 스승같은 아들과 함께 여행중에
▲ 맑고 순수한 스승같은 아들과 함께 여행중에

시련의 연속

아버지는 보령 성주에서 탄광 일을 했지만, 월급날이면 어김없이 놀음으로 그달의 월급과 또 월급만큼의 빚을 져야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집에 오면 폭언과 폭력이 이어졌으며 살림도 온전히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와 온몸과 마음을 희생해 다섯 자식과 살림을 꾸려 가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야만 했습니다. 나는 결혼해서 그런 부모님처럼 살지 않겠다고, 꼭 행복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저는 스물아홉에 결혼했고, 남편과 저는 안정적인 직장도 있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큰아들을 낳고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까지는 아들밖에 모르는 시어머니가 힘들게는 했지만, 그래도 남부럽지 않은 결혼생활이었습니다.

둘째는 태어나면서 첫울음도 울지 못하고, 분유도 빨지 못하고, 전혀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서울대 신생아 중환자실 인큐베이터에 주사 줄이 주렁주렁 달린 아이의 모습을 보며, 하루하루가 눈물이었습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지금까지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왜, 왜...’ 아이는 호전이 없었고, 모든 검사를 다 해봤지만, 병명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대 병원에서조차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아이를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그때 마음은 죽을 것 같았습니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IMF로 공무원도 구조조정으로 인원 감축에 들어갔고, 제가 그 대상자였습니다. 저는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느낌이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를 비웃는 듯했습니다. 그냥 이 아이를 데리고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지만,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은 큰아이를 보면서 내가 미쳤구나 생각했습니다.

아픈 아이를 위하여 무작정 절하고 또 절하고

직장을 잃고 아이를 살려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찰에 앞집아줌마를 좇아서 아픈 아이를 업고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절을 했습니다. 울면서 우리 아이 살려만 달라고 매달리며 절했습니다. 22개월이 되었는데, 앉지도 못하는 아이를 앉을 수 있게 해달라고, 걷게 해달라고, 말하게 해달라고 절하고 또 절했습니다.

2020년 인도성지순례(오른쪽 첫번째가 백현희 님)
▲ 2020년 인도성지순례(오른쪽 첫번째가 백현희 님)

새로운 세계, 불법(佛法)을 보다

매주 아이 둘을 데리고 서울까지 병원 진료와 물리치료를 하러 다녔습니다. 그 당시는 고속도로가 없어 서울까지 다니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고, 1년 뒤 저는 직장에도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이 둘을 데리고 직장생활하기가 녹록지 않아서 그런지 이제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산후풍과 허리디스크 파열로 두 번의 수술과 자궁적출 수술로 온몸은 아팠습니다. 아이는 꾸준히 병원에 다니면서 희귀 염색체 질환인 프래더 윌리 증후군이라는 병명도 알게 되었고, 지체장애 3급 장애판정도 받았습니다.

둘째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학교폭력까지 휘말리면서 팔이 부러져 수술을 받았습니다. 언어 소통이 어려운 아이는 오히려 가해자로 몰리게 되었고, 엄마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보았고, 2010년 <깨달음의 장>에도 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항상 뭔가를 간절히 바라면서 절하고, 금강경, 지장경을 독송하는 것이 불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바라는 마음이 아닌, 참회하는 마음으로 새벽에 정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법륜스님 책을 모조리 읽고, 유튜브 즉문즉설을 매일 듣고, 아들을 데리고 달려가서 질문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풀어갔습니다. 아이를 대신해서 세상과 소통하려 부단히 노력했고, 아이는 그런 엄마에게 절대적 신뢰를 하게 되었습니다.

돌파구가 되어 준 정토불교대학

그렇게 아이를 위해 몇 해를 보내면서 아이는 좋아졌는데, 남편과는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이에게 매달려 사는 동안, 말수가 적은 남편은 그냥 기둥 같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든든한 존재였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남편과 부부싸움이 잦아졌고, 돌파구로 찾은 것이 정토회 불교대학이었습니다. 아들을 좀 더 키우고 정토회에 가야지 생각했는데, 괴로우니 살기 위해 정토회를 찾았고,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불교대생 상담으로 온 묘광 법사님에게 미주알고주알 얘기를 털어놓으니, 다 들은 법사님은 “새벽에 법당나와서 절 좀 하면 좋겠다”라고 한마디 했습니다. 직장 다니며 새벽에 법당나간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못하겠다고 우겼지만, 법사님은 그냥 21일 만이라도 해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멀어져 가는 남편

법당에서 절을 할 때는 모든 게 이해되는 듯했지만, 집으로 향하면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네가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직장생활에 두 아이 육아, 장애를 가진 아이 돌보며, 살림까지 그러면서 어떻게든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 꿋꿋하게 버텨왔는데... '냉담한 시어머니 뜻 받아들이며 잘해보겠다고 매일 아침 참회 기도하며 살아온 거 옆에서 봤잖아... 그런데 어떻게 남편인 당신이 그럴 수 있어... '하는 원망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편은 더 멀어졌습니다.

남편은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그 여자하고는 많은 이야기를 깊이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남편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당신이 내게... 였습니다. 내가 어떻게 지난 세월을 살았는데...

남편은 잠시 떨어져 살자 제안했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은 하얗게 됐지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중에도 법당 일은 또 바쁘게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저를 버티게 하는 힘은 오로지 아침마다 하는 절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은 큰아이 군 제대 이틀 앞두고 집을 나갔습니다.

가정이 깨지고 남편이 집을 나간 상황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에 남들에게 얘기할 수도 없었고, 법당 도반이 알까봐 전전긍긍했습니다. 수행하면서 부부가 행복해지고 자녀들과 사이가 좋아지고, 고부간의 갈등이 해결이 됐다는 수행담을 들을 때마다 더욱 스스로 움츠러들었습니다. 그렇게 불교대생 1년은 괴로움을 덩어리째 움켜쥐고 새벽에 법당 나와 기도하고, 주말에는 1,000배 정진을 해가며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경전반 학생으로 부총무 소임을 맡다

불교대학 들어와서 귀에 제일 와 닿았던 말은 “여기는 무엇이든 모두 봉사로 이루어져요, 그러니 누구나 다 해야 해요.”라는 말이었습니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없으니 누구든 봉사를 해야 법당이 유지되니 당연히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교대학을 졸업도 하기 전에 12월, 9차 천일결사를 준비하면서 부총무 대행으로 지목되었고, 경전반 학생으로 부총무 소임을 맡았습니다. 정토회의 시스템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저로서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선배 도반들은 모조리 통특위로 나가고 법당에 활동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불교대학을 졸업도 하기 전에 부총무 대행을 맡게 된 저는 정토회 용어도 이해 못 해 혼란스러웠습니다.

정일사는 새로운 절이 있는 줄로 착각하고 일정 공지가 내려왔는데, 법당에 공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부총무 소임, 경전반 학생, 불교대학 담당, 법당의 모든 업무를 익히고 배우고 또 처리해나가야 했습니다. 낮에 직장에 다니다 보니, 아무리 뛰고 뛰어도 주간에는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라리 대충 살았으면 행복했을까

저는 어릴 때부터 항상 베푸는 사람이었고, 형제자매를 위해서 모든 걸 다 양보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을 위해서 시어머니를 위해서 노력하고, 장애아가 있지만 ‘나는 행복해야 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항상 최선을 다하고 애쓰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냥 살아도 되는데, 그냥 대충 살았으면 오히려 행복했을 텐데, 내 가정은 행복해야 한다는 그 틀을 고집하면서 남편을 괴롭게 하고, 결국 가정을 행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유튜브를 듣고 참회 기도를 한다고 열심히 절하였던 그 시절에는 법문도 내 생각대로 해석하고, 내 나름으로 참회 기도를 하면 남편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기도했습니다. ‘또다른 나를 세워놨으니 남편은 이렇게 철벽을 치고 완벽히하려는 나에게서 참 외로웠겠구나! 아들에게 매달려 있는 마누라에게 편한 구석이라고는 없었겠구나, 참 많이 힘들었겠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애쓴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니, 소임도 즐기게 되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자신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자신을 알아줘야 한다."는 묘광법사님 말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아무도 몰라주는데 법사님은 나를 알아주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힘들게 살았구나, 애쓰고 살았구나’ 하며 정진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정말 애쓰고 산 것이 아니라, 애쓰고 살았다는 착각을 하고 살았구나, 애쓸 바가 없었는데’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됐습니다.

내가 애쓰며 살았던 것도 그 속에서 내가 인정받고 위로 받으면서 얻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사실 나를 위해서 한 것이지 결코 내가 희생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소임을 편안하고 가볍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주변 도반들로부터 소임을 즐기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위한 활동은 내 업식을 깨는 것

불교대학 홍보한다고 주말에는 현수막 달러 다니고, 새벽에 나와 거리에 전단지 붙이고 다니면, 출근할 때는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웠습니다. 다른 사람이 안 하면 나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가볍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대학생들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봉사하는 활동가, 정회원이 많아져 소임을 조금씩 나누어 맡아 모든 도반이 함께하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도반들과 나누기, 교육, JTS캠페인, 환경실천 활동을 통해서 서서히 마음의 눈은 내 틀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왕 세상에 태어난 거 세상을 위해서 진짜 생산적인 삶을 살라는 말이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을 하면서 일에 부딪히고 도반들과 부딪히면서, 제가 움켜쥐고 있는 쪼잔한 모습, 제 안의 꼬라지와 꼭 마주하게 됩니다. 결국 세상을 위한다는 활동은 내 업식을 깨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깨지고 나니, 그 나름대로 꽤 괜찮은 내가 있다는 것, 다듬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소임을 맡게 되면 그만큼 마음그릇이 커지고, 점점 세상을 보는 관점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소임은 복임을 알았습니다.

활동가 나들이 때 도반과 함께(오른쪽 첫번째가 백현희 님)
▲ 활동가 나들이 때 도반과 함께(오른쪽 첫번째가 백현희 님)

누더기 천이 아름다운 조각보가 되어

아이와도 워낙 바쁘다보니, 함께 있어 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는 엄마 법당에 보시했어, 그러니까 그냥 법당에 가. 그리고 엄마, 나 이제 스무 살 넘었어, 내 인생 내가 살테니까 엄마도 이제 엄마 인생 살아."라고 말해주는 아들은 분명 스승같은 깨달음을 주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지금도 제 주변과 상황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더 안 좋아진 상황처럼 볼수도 있지만, 지금 이렇게 가벼울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자리가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전에는 사연 많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너무 많은 일들이 겹치고 힘들다는 생각에 겹겹이 깁고 꿰매놓은 누더기 천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경험이 어우러진 마치 한 조각, 한조각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조각보 같은 삶으로 보입니다. 인생에 실패는 없고, 다만 경험만 있을 뿐이라는 말처럼 제겐 너무나 많은 인생 경험 스펙이 쌓였을 뿐입니다. 이 스펙을 이제 나누며 살고자 마음먹어봅니다. 아직은 삐뚤빼뚤 엉성한 조각보이지만, 사람들의 아픔을 감싸는 조각보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행정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글_허지혜 희망리포터(서산법당)
편집_하은이(대전충청지부)

전체댓글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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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

존경스럽습니다

2021-03-22 03:43:35

보디사트바

아름답습니다. _()_

2020-06-18 20:43:29

김미화

아름다운 조각보 보살님
감사합니다.
인생의 많은 고갯길을 넘으시면서 흘리셨을 눈물 이 보석이되었네요.
아드님도 잘성장하여 자립심의
귀감이 되네요. 많이 배우고 정진하겠습니다. 보살님 감사합니다.

2020-03-23 07: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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