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파리법회
분별심을 통해 깨달아가는 환희의 순례

프랑스 파리법회에는 늘 성실하게 수행하고, 누구보다 환경 운동에 앞장서는 권정화 님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녀가 인도로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성지순례를 결심하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겨 인도를 다녀오기까지, 권정화 님의 인도순례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초등생 삼 남매를 두고 인도로 ?!?!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 4학년 세 아이를 남편에게 2주 넘게 맡기고 떠나는 일정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라 주변 사람들 모두 당황스러워했습니다. 제가 인도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2년 전, 불교대학에 다닐 때입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는 있지만, 육아와 병행하느라 수입이 많지는 않아, 그때부터 계획하고 저축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제 계획을 들은 남편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이틀이 지난 후에 답을 주었습니다. 그때 다녀오라고 바로 말을 못 해서 미안하다고, 살림에 보탤 거라 생각했던 돈을 혼자 쓴다고 해서 처음엔 마음이 불편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기로 했을 때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막지는 말자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고 했습니다. 그냥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 가는 것이니 잘 준비해서 다녀오라고 격려도 해주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마치 본인이 순례 가는 듯 이것저것 모두 챙겨주었습니다. 원래는 남편이 아침 일찍 아이들을 학교에 맡기고, 저녁에 데려오기로 계획했는데, 시어머니께서 걱정이 되셨는지 아이들을 함께 봐주시겠다고 해서 더욱 마음이 놓였습니다.

영축산에 오르는 길, 오른쪽 권정화 님
▲ 영축산에 오르는 길, 오른쪽 권정화 님

‘조원들과 저녁밥 잘 해 먹는 소임’의 조장이 되다

막상 떠난다 생각하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일정이 아주 빡빡한 걸 아니 그걸 다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어딘가를 떠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고, 집에서 해방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해외에서 출발하는 순례객들은 2차 사전 교육을 현지에서 하는 일정이라 하루 먼저 도착해야 합니다. 저는 2020년 1월 1일, 새해 첫날 출국하였습니다. 공항에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인사하는데, 큰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저를 꼭 잡았습니다. 가족들에게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또 한편으로는 고마웠습니다. 잘 다녀와야지, 또 한 번 다짐했습니다.

해외팀은 총 34명이 참가해서 한 차에 모두 탔습니다. 그 안에서 차장을 정하고 또 네 개의 조로 나누어 조장을 정했는데, 제가 한 조의 조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유럽과 호주, 필리핀에서 온 열 명의 도반과 함께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 낯선 나라, 빡빡한 일정…. 두려움은 무지에서 온다는 말이 딱 맞았습니다. 차장•조장 교육에서 ‘조원들과 저녁에 밥 잘 해 먹는 것이 조장의 역할’ 이라는 법사님의 말씀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렇게 19일간 여정의 막이 올랐습니다.

사르나트 초전법륜성지에서 해외팀. 가장 뒷줄 왼쪽 두 번째 권정화 님
▲ 사르나트 초전법륜성지에서 해외팀. 가장 뒷줄 왼쪽 두 번째 권정화 님

순례는 우리만 좋은 것이 아닌, 이곳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해외팀이 하루 일찍 도착해 묵는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천막촌이 있었습니다. 전날 답사하러 오신 스님께서 그곳에 가난한 사람들을 보시고 담요와 과자를 나눠주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예전 이곳 사람들과 연관된 이야기로, 이곳 사람들이 스님께 이런 넋두리를 했다고 합니다. "외국에서 인도로 순례 오는 사람들은 자기들 여행만 하고 가버리지, 부처님의 자비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이곳의 가난한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이런 말을 들으니 정말 뜨끔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인도에 와서 우리 좋은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을 배려하고 가난한 이들을 더욱 보살피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막촌 사람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하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한편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줄 수도 없고 안 줄 수도 없는 안타까운 마음, 한 아이의 눈빛을 보고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약간의 돈을 준 한 도반님에게 사람들이 마구 몰리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수자타 아카데미에 갔는데 이번에는 너무나 다른 광경에 놀랐습니다. 정말 가난한 마을임에도 사람들 표정이 너무나 환했고, 그곳의 아이들은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눠보려 했지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사람들이 구걸하지 않도록 가난 퇴치를 도와야 하는데 그것의 기본이야말로 교육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스님이 30년간 해오신 일의 결실을 눈으로 직접 보니 더욱더 스님의 원에 대한 믿음이 커졌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 주변 마을에 있는 유치원 앞에서
▲ 수자타 아카데미 주변 마을에 있는 유치원 앞에서

지은 인연의 씨앗은 민들레 홀씨 되어

또 다른 에피소드는 인도에서 출국하여 네팔에 입국했을 때 일입니다. 우리가 도착하니 엄청난 환영단이 저희를 맞아주었습니다. 옷을 차려입고 나온 네팔 사람들이 우리 순례자들 모두에게 꽃목걸이와 평화를 상징하는 흰 스카프를 걸어주었습니다. 그 사연인즉슨 27년 전 스님이 한국에 노동자로 일하던 네팔 사람들을 위해 법문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중 한 분이 그때 스님께 너무나 감사했던 마음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님이 해마다 오시는 것을 알고 어떻게든 환영을 해드리고 싶어 인맥(?)을 동원하여 환영단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스님께서 27년 전에 뿌린 씨앗이 아직도 인연으로 남은 것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이번 일을 경험하면서, 지금 내가 어떤 씨앗을 뿌리든 그것이 바로 나타날 수도 혹은, 30년 뒤에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조심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상카시아에서 만난 석가족 대표님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리들은 1년에 한 번, 스님께서 인도순례를 오실 때에만 스님을 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한국에서부터 이렇게 스님을 직접 모시고 순례도 오고, 좋은 법문도 듣고, 수련도 할 수 있으니 정말 부럽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이번 순례기간 하루하루가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는 분별심을 만들어내는 기계인가 ?

‘많이 힘들 거다, 샤워는 거의 못 한다고 생각해라, 엄청 춥고 더럽다, 먼지와 공해가 심하니 마스크는 항상 착용해라.’ 이 말은 제가 성지순례를 준비할 때 들었던 말입니다. 그래서 더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인도가 그간 장족의(?) 발전을 해서인지 저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예상보다 힘들지 않아서 불만이라고 했다가 다른 도반님들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라고요.

반면, 순례기간 동안 마음은 요동을 쳤습니다. 안내대로 따라주지 않는 분들, 쓰레기 분리를 안 하거나 못하는 상황, 안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상황, 혹은 도반의 말투나 행동에서 분별심이 끊임없이 올라왔습니다. 그때마다 바로 알아차리고 웃기는 했지만 그런 저를 보며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나는 분별심을 만들어내는 기계인가' 싶었습니다.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천진난만하고 환한 아이들 웃음을 보면서,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이름이 뭐에요?" 물으며 다가오는 당당하고 행복한 아이들을 보면서, 행복은 돈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도 나눌 줄 모른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순례기간 내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했습니다.

예불을 드리는 성지에서, 스님의 축원문이 제 가슴을 파고들어 많이 울었습니다. 항상 고통받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자 애쓰는 스님의 진심이 저를 다시 돌아보게 했습니다.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20년 넘게 부처님 곁에서 수행을 했지만 깨닫지 못하다가 어느 날,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의 의미를 깨닫고 환희를 느낀 것처럼 저 역시 인도에서 스님의 행보가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30여 년 이어온 스님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삶을 직접 눈으로 본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확연하게 알았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점심 공양을 하며
▲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점심 공양을 하며

나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순례를 마치고 난 직후에는 감사의 마음뿐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복해지는 길을 알려주심에 감사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내가 사는 시대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스님께 감사하고, 그 뒤를 따라가려는 우리를 위해 길을 닦아주시는 법사님들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특히 실무 진행팀과 스탭들에 대한 감동이 컸습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스님께서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정토회의 이름으로 이루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원에 함께 하고자 인생을 바친 것을 직접 보고 나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되묻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목에 걸린 줄이 많으니 그것들을 다 끊을 수는 없지만,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해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도로 떠나기 전, 사실 파리정토법회 부총무 소임이 주어졌지만 못하겠다고 버티던 터였습니다. 인도에 다녀온 후 비로소 알았습니다. 제가 그간 나 혼자 잘났다고, 나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가를 말입니다. 이제는 압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공덕으로 가능한 일임을요. 이제는 소임을 가볍고 즐겁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 제가 너무 부담된다고 했을 때 다른 도반들이 "얼마나 큰 복을 받으려고 총무직을 받은 건지 아느냐 ?" 고 했던 말뜻을, 순례 마지막 날에 비로소 그 의미를 알 것 같았습니다. 혼자가 아닌 도반들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도 성지순례 기간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오는 분별심을 보며 부총무직을 맡은 삼 년간은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만큼은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기원정사에서 법문을 들으며
▲ 기원정사에서 법문을 들으며

인도 성지순례를 계획하고 있는 도반들에게 드리는 팁!

인도는 인생에서 한 번은 꼭 가봐야 하고 가능하면 두 번, 세 번 가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갔을 때는 뭘 모르고 따라다니기만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여러 번 오신 분들은 참 여유 있어 보였습니다.

불교대학 졸업 후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공부한 내용이 가물가물했는데, 순례하며 다시 한 번 부처님의 일생을 배우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요즘 불교대학을 담당하고 있어서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한번 더 복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성지순례를 다녀온 뒤에는 불교대학 담당을 맡아 보는 것을 조심스럽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정토회에서 소임을 맡으라고 하면 선뜻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안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인도를 가면 느끼는 것이 정말 많고, 끝날 때쯤에는 모두 이런 좋은 법을 전하는 것을 소임으로 맡아 해보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소임을 맡아야 하니 인도 성지순례를 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가면 나만 보고 살던 삶, 대신 내가 나눠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인터뷰_최연희 희망리포터(파리법회)
편집_박승희 (해외지부)

전체댓글 19

0/200

정향

정토세상을 향해 함께 가는 도반임이 자랑스럽습니다. 수행 보시 봉사를 묵묵히 실천하시는 모습 본받겠습니다.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_()_

2020-02-29 12:55:54

이지훈

감사합니다

2020-02-28 20:49:41

세명화

수행담 읽으며 울컥했습니다ㆍ
요즘 해이해져서 뭐가 중심인지 놓치고 살았는데
다시금 되 잡아 봅니다ㆍ

2020-02-18 10:20:54

전체 댓글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파리법회’의 다른 게시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