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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즈음이었던가 공부에 쩔어서 지내던 시절, 이다음에 우린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하고 친구와 자주 공상의 나래를 폈었습니다.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도 없이 망상을 이어갔었고, 출가한 비구니 스님의 모습으로 만나는 로망도 그 망상 중의 하나였습니다. 동쪽으로 기운 나무는 동쪽으로 쓰러진다고 했던가요.
대학 생활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했습니다. 법우들과 모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면서 마치 논쟁을 위한 법회도 했습니다. 방학 때마다 수련회를 한다고 절을 찾게 되었고, 졸업하고서는 송광사의 “출가 4박 5일”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석한 게 오랫동안 불교의 정서를 갖게 된 바탕이 된 듯합니다.
결혼해서는 시어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부인을 힘들게 하는 효자 스타일도 아니었는데, 어머니와 같이 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른 그늘에서 생활한다는 게 힘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밖을 나가도 어머니를 이고 나가는 느낌이랄까요? 자식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절에도 열심히 다니셨습니다. 보시도 자식 잘 되라고 많이 했는데, 어느 때는 외상이나 빚을 내어 할 정도였습니다. 내 마음은 ‘어머니가 저러지 않고,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는데...’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6자매의 5번째로 태어난 나는 큰언니와 띠동갑차이가 납니다. 늘 엄마처럼 보살펴준 언니가 말을 하면 무슨 말이든 그냥 따르려고 했습니다. 언니는 이절 저절 다니다가 정토회를 만났습니다. 어느 날, 언니가 넌지시 <깨달음의 장> 한번 가보라는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회색 법복을 예쁘게 차려입고 문경으로 갔습니다.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후에는, 어머니께 “예.”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게 조금은 편안하게 느껴졌다고 할까요? 그리고 기존에 다니던 사찰에서 공부하면서 느낀 법문에 대한 뭔지 모를 답답함, 미진함, 갈증을 정토회에서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108배 수행기도를 하고 있는 나를 관심있게 지켜보던 남편은 1년 후에 <깨달음의 장>을 다녀왔습니다.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남편은 적극적으로 법당을 찾아 수행법회에 참석하더니, 이제는 수행자로서 잘 쓰이고 있습니다.
그 후, 2015년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불교대학의 실천적 불교사상 첫 법문에 나오는, 양동이를 뒤집어 쓰고 그 안에서 내가 옳다고 아우성 친다는 이야기에 가족들에 대한 원망, 특히 시어머니와 짝짜꿍이 맞았던 형님에 대한 미움이 저절로 녹아내리고 빳빳한 뒷목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구나...내가 그랬구나..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습니다.
90을 넘기면서 치매를 앓던 시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자라서 잔손 갈 일이 줄었습니다. 셋째 막내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교사로서의 직장생활도 정리를 했습니다. 이제 천천히, 할 일 없이, 게으르게, 심심하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덜컥 가을불교대학 담당이 주어졌고, 퇴직하는 날이 불교대학 입학식 날이었습니다. 그것도 봄불교대학 학생신분으로서 아직 여물기도 전에 가을불교대학 담당을 맡게 되었으니, 맡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렇게 시작하여 3번의 불교대학 담당과 2번의 경전반 담당을 통해 귀한 법문을 원없이 듣고 있습니다. 돌이키는 힘도 법문을 통해 얻고, 무엇보다 담당을 맡으며 다양한 문제를 가진 많은 사람의 나누기를 통해서 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가족끼리 뭔가 걸리는 게 있으면 마음나누기를 합니다. 얼마 전 둘째 딸과 걸리는 게 있어 가족이 모여 나누기를 했습니다. 딸은 대학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재수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처음엔 “학교를 계속 다녀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설득을 했습니다. 나중엔 재수에 대한 아이의 생각이 확고해 보여 '그래, 일단 학교를 그만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찾아보고 재수를 하자'면서 여행을 권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딸은 마음을 정리했다며 재수를 접고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딸의 마음은 그때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엄마의 말은 ‘재수를 해’였지만 딸은 ‘그냥 다녔으면 좋겠어.’ 라고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나는 정말 재수시킬 준비를 확실히 하고 있었는데, 왜 딸은 그렇게 듣고 느꼈을까?’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과거를 꺼내어 보았습니다.
‘미안해, 그 땐 그게 최선인줄 알고 너희를 그렇게 키웠어.’등으로 이어지는 가족 나누기. 딸아이는 울면서 자신의 마음을 꺼내놓았습니다. 매사 잘 챙기지를 못해 늘 엄마에게 혼나던 큰딸, 늘 혼나는 언니를 보면서 혼나지 않고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해 원하는 답지를 가져왔던 작은 딸, 다섯 명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각자 자기와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내 마음은 재수해도 좋겠다는 거였고, 지금이라도 딸이 선택을 한다면 대학을 다시 보내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허락되지 않는 마음이 그때야 풀렸습니다.
수행이란 ‘내가 왜 그럴까?’ 하는 나에 대한 의문이 촘촘하게 있어야 하며, 나에 대한 면밀한 탐구가 바탕에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내 질문이 빵빵하게 가득 차 있을 때 누군가 툭 던져주는 말 한마디에도 폭 터지면서 마음이 환해지고 힘이 생기게 됨을 느꼈습니다. 아침에 108배 절하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라, 수행자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수행임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요즘 도반들에게 생기와 활력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이 변화에는 정토를 일구는 사람들(정일사)가 있었습니다. 정일사를 통해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 나, 작은 일들은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를 보게 됩니다. 도반들과 부대끼지 않으려고 얘기하지 않고 넘어가고 지워버리고 덮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작은 일들은 켜켜이 침묵으로 마음에 쌓이고 쌓여 재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소임을 하면서 생기는 작은 걸림도 덮거나 넘어가지 않고,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꺼내놓으려 합니다. 내가 꺼내놓으니 당시 상황과 마음이 어떠했다는 도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습니다. 서로가 감정의 찌꺼기를 훌훌 털어내고 다시 가볍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은 법당에서 새벽기도를 합니다. 도반과 함께하는 기도는 화합과 청정함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도반들이 사정이 있어 혼자서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조금 지나자 신발장 소리, 현관 문소리, 뒷자리에 누가 함께하는 조심스런 몸동작이 느껴집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마치고 돌아보니, 오랫동안 법당에 안 나와 궁금해 하던 도반이 꿈결처럼 합장하며 “성불하십시오.” 하며 웃어주었습니다. 도반이 스승이고 부처님이었습니다.
또 수요일엔 사시예불을 합니다. 사시예불을 하고 있으면, 법회 담당하는 도반들이 들어와 살금살금 법회준비를 합니다. 기도 중에 들리는 스위치 켜는 소리, 엠프 켜는 소리, 빔, 컴퓨터 켜고 영상 확인하는 소리 등은 사시예불과 어우러져 오늘도 법당이 살아나는 장엄한 소리가 됩니다. 그 장엄한 천안법당에서 경전반을 담당하고, 불교대학 팀장을 맡아 남산 순례, 경전반 팀별봉사, 불교대학 중간 갈무리, 졸업수련, 지부회의, 주례회의, 월례회의, 주저합동회의, 이 교실, 저 교실을 오가며 오늘도 도반들과 함께 그냥 합니다.
글_이애순 희망리포터(천안정토회 천안법당)
편집_하은이(대전충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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