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강서법당
도반이 나의 스승입니다

강서법당 봄불교대학 학생들을 편안하게 이끌어 주시는,
꽃처럼 아름답고 잘 물든 단풍 같은 이경희 님의 이야기입니다.

정토회와의 인연

원래 종교는 불교였습니다. 친정 부모님이 절에 다니셨으니 따라가고, 결혼하니 시댁에서도 절에 다니시니까 따라가곤 했지요. 종교란에 불교라고 쓰긴 했지만 사실 절에 가면 절만 하고 왔지 아무것도 깨달은 것도 없고 느끼는 것도 없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거기서만 55년을 살다가 딸이 서울로 발령을 받으면서 손자를 돌봐 주러 함께 올라왔습니다. 서울은 여행으로 한 번씩 와 봤지 부산에서만 살던 사람이 처음 서울에 올라오니 아는 사람도 없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어요. 그래서 법화경 사경도 하고 불교방송 라디오도 자주 들었는데 어느 날 정토불교대학 광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부산에 있었으면 친구들도 있고 놀 것도 많으니까 그런 생각을 못했을 텐데 그 광고를 듣고는 불교 공부를 해 보자는 마음이 났습니다. 그 전에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에 법륜스님이 나오신 걸 보고 스님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보던 스님하고 너무 달랐으니까요. 부산에서 절에 다닐 때 들은 법문은 제가 못 알아듣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법륜스님의 말씀은 정말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기 가면 알기 쉽게 가르쳐 줄 것 같아서 그냥 찾아갔습니다. 서초법당에 전화해 우리 집 근처에 갈 수 있는 곳을 문의했더니 강서법당을 알려 주셨고, 주소 들고 제 발로 찾아왔지요.

그렇게 2015년 가을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스님이 직접 강의해 주시는 줄 알았는데 스크린에서 나오셔서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주 알아듣기 쉽게 법문해 주셔서 불교대학 1년을 신나게 다녔습니다. 경전반도 그렇고요. 불교대학 때는 수련 안 간 것 빼고는 결석을 한 번도 안 해서 정근상을 받았습니다. 정토불교대학에 와서 지금 이 순간도 무척 재밌고 즐겁습니다. 정토회에서 말하는 진정한 수행자는 못 되고 스스로도 날라리 수행자라고 생각하지만 저 같은 사람도 수행자 맞는 거죠? 지금도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봄불교대학 학생들과 함께,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경희 님
▲ 봄불교대학 학생들과 함께,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경희 님

참회와 알아차림

불교대학 수업에서 스님이 주시는 불교에 대한 가르침은 참 생소했습니다. 제가 불교 공부를 한 번도 안 해 봐서 그랬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재밌고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법당에 나오는 게 좋았어요. 불교대학에서 수행 맛보기 하고 바로 이어서 천일결사에 입재하면서 수행을 시작했는데 그때 입재식에서 들은 스님 법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3년을 기도하면 내 꼬라지를 보게 된다는 말씀에 '과연 내 꼬라지가 어떤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단순하고 쾌활한 성격이다 보니 심각한 문제에 도달해도 무겁게 생각을 안 해요. 지금껏 그런 거 심각하게 생각 안 하고 산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힘든 일은 없었는데 내 꼬라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탁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막무가내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행도 5시에 하라고 해서 알람을 맞췄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힘들어하면서도 일어나긴 벌떡 잘 일어났습니다. 이유를 붙여서 조금 더 자야지, 이러지 않고 눈을 감고서라도 일어났습니다. 기도하다 보면 졸 때도 있었고,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무릎이 문제였습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산악회 따라 1, 2년 열심히 등산을 다니다가 무릎이 고장 났었거든요. 108배 하기 너무 힘들어서 24배부터 시작해서 차츰차츰 늘려 나갔습니다.

수행을 시작하고 100일 정도 지나면서 참회를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제가 마흔 살에 이혼했는데 아이들 아버지와 성격적으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남편에게 참회했어요. 더 이상 같이 살진 않지만 남편을 향한 마음에 원망이 없어야 그 업이 안 내려갈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일 미운 사람이 남편이었는데 가장 먼저 그 사람에게 참회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니 남편 잘못이 아니고 제 잘못이었더라고요. 그걸 깨달으면서 모든 걸 받아들이니까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했던 내 꼬라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집이 굉장히 강하고, 또 교만하고, 내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이기심도 굉장히 많은 나를 보았습니다. 나를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을 다 괴롭혔다는 걸 깨달았지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주위 사람들에게 무조건 참회하는 마음으로 수행했습니다. 참회가 시작되면서 고마운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딸을 태어나게 해 줬으니까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게 되었습니다. 나한테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무조건 고마웠습니다. 애들 아버지라는 존재만으로요.

수행하면서 내 꼬라지를 보는 게 아주 재밌었습니다. 그러면서 알아차림이 시작됐던 것 같아요. 반성은 안 하면서 알아차리기만 하면 뭐 할까 싶었지만 우선 알아차림부터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알아차리면서 방편이 생각났습니다. 알아차리면서 내가 행할 수 있는 길이 조금씩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화가 났을 때는 알아차리면서 화를 안 내게 되고, 왜 화가 나는지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한 상황을 해결해 나가는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가장 먼저 내가 뭘 잘못했는지 깨달으면서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됐었습니다. '상대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면서 타협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나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있어 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불교대학 수업 후 나누기 중인 이경희 님
▲ 불교대학 수업 후 나누기 중인 이경희 님

고행이었던 소임이 행복으로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경전반에 다니고 있을 때, 봄불교대학 담당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우리 경전반에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컴퓨터도 할 줄도 모르는 저한테요.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 그때 우리 경전반을 담당하던 분에게 여쭤보았습니다. 불교대학 때부터 담당이었던 그 분은 제가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분이었습니다. 저한테 불교대학 담당을 하라는데 무슨 이런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했을 거예요, 담당 맡으면 보살님한테 좋아요’ 라고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이 해 보라고 하니까, 또 저한테 좋다고 하니까 그래서 담당을 맡아 시작을 했는데 완전히 고행이었습니다. 컴퓨터를 못하니까 출석 체크도 제가 못하고 컴퓨터로 하는 건 부담당이 도맡아 했습니다. 저는 사회 보고 점심 공양을 준비했습니다. 밥하는 건 자신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 역할을 못한다는 생각에 수업에 올 때마다 부담스러웠습니다. 다른 담당자들처럼 할 수 있으면 괜찮은데 내 일을 남한테 떠맡기는 것 같아 불편했습니다. 그게 저의 이기심과 아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담당을 하면서 대충 넘어가고 어리바리한 저의 본성을 밑에 감추고 교만하게 살았던 게 다 들통이 났습니다. 부담당이 많은 실수를 잡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다' 싶어서 불교대학 졸업할 때쯤 되어 경전반은 맡지 않으려는 생각에 경전반으로 올라간 졸업생 4명을 전부 저녁반으로 보냈습니다. ‘탈출했다!’ 하고 속 시원하게 있는데 경전반이 없으니까 봄불교대학을 맡으라 합니다. 처음엔 안 한다고 고사하다가 인도에 다녀와서 마음을 바꿨습니다.

인도에 다녀와서 다시 봄불교대학을 맡았는데 마음이 가벼웠어요. 컴퓨터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총무님이 컴퓨터는 특별한 게 아니고 기술이다, 두려워서 안 했을 뿐이지 하면 할 수 있다고 하여 그 말에 힘을 얻어 시작했는데 지금은 독수리 타법이지만 다 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가 공포의 대상이었나 봅니다. 그게 자신 있으니까 지금은 불교대학 수업이 기다려집니다.

2018 봄불교대학 입학식, 맨 앞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이경희 님
▲ 2018 봄불교대학 입학식, 맨 앞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이경희 님

우리 봄불교대학에 좋은 분들이 다 모였습니다. '제가 참 인덕 있는 사람인가' 그런 생각도 합니다. 부부 도반님이 계신데 그 두 분이 앞에 앉아 계시면 수업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앞에서 딱 이끌어 가시는 분들입니다. 아울러 모든 도반님들 덕분에 불교대학 담당 소임을 쉽게 한 것 같습니다. 도반이 제 스승입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이제 1년을 잘 마무리하고 있는데 이번엔 경전반에 같이 올라가려고 합니다. 저녁반으로 안 보내고 제가 맡아서 끝까지 할 겁니다.

업식과 마주한 인도 성지순례

인도 성지순례를 패키지여행 정도로 생각하고 갔습니다. 뉴델리에 도착했는데 ‘여기 내가 왜 왔을까’ 싶었습니다. 수행하면서 내 꼬라지를 봤다고 해도 분별심이 많이 생겼습니다. 낮과 밤의 온도 차도 심하고, 너무 습하고, 잠자리도 영 불편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지만 함께할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 법당에서 네 명이 같이 갔는데 그 도반들이 저의 스승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도반이 스승이라는 걸 느끼고 살았지만, 그 힘든 가운데에서도 두 분이 새벽에 수행하는 걸 보고 다시 한번 느꼈지요. 저는 오로지 씻지 못해서 투덜거리고, 남들보다 먼저 가서 씻을 생각만 했는데 그 업식을 버리지 못하는 저를 보면서 평생 수행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때까지 인간관계는 원만히 할 수 있었어도 내 안의 깊은 업식은 아직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습니다. 인도에 다녀오고 하루 이틀 지나면서 매일 그곳이 떠오릅니다. 고난 속에서 내 모습을 바라보고 내가 어떤가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내 마음이 정화되었습니다. 올해엔 동북아 역사 기행에 가려고 합니다.

인도성지순례에서, 맨 앞이 이경희님
▲ 인도성지순례에서, 맨 앞이 이경희님

인도 성지순례에 함께 간 강서법당 도반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경희 님
▲ 인도 성지순례에 함께 간 강서법당 도반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경희 님

평생의 소임, JTS 거리 모금

불교대학이나 경전반 담당은 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제가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소임이 뭘까 생각해 보니 JTS 거리 모금이었습니다. 마침 담당자가 공석이었고요. 내 나이 60이 넘어 이제 죽을 날이 가깝다 생각하니 과연 내가 이 때까지 살아오면서 오로지 순수하게 남을 위해 한 게 뭐가 있나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해타산이 맞으니까 잘해 준 거였고, 담당도 내 욕심에 잘하려고 한 거였습니다. 그저 내 마음을 낼 수 있는 건 JTS 활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으면서 ‘그 일 하나는 내가 참 잘했구나’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소임을 맡아 시작했습니다. 제가 큰 병이 나서 못 움직이면 어쩔 수 없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고 싶습니다. 지금 넉 달 정도 됐는데 여러 도반님들이 많이 도와주십니다. 빡빡한 세상에 나같이 허술한 사람이 좋아 보였나 봅니다.

JTS 거리 모금 후 단체 사진,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경희 님
▲ JTS 거리 모금 후 단체 사진,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경희 님

상대의 마음도 가볍게 해 주시는 이경희 님을 보면서 소임을 대하는 제 마음의 무게는 어떤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너무 무겁진 않은지, 의무로 생각해 상대마저 무겁게 만들진 않았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에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정도로 즐겁고 따뜻한 시간을 보내서인지 날은 추웠지만 춥지 않았습니다.

글_오수진 희망리포터 (양천정토회 강서법당)
편집_권지연 (서울제주지부)

전체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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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임

우리보살님
늘~~웃고 잘챙겨주시고
일낼줄알았습니다
대단하세요~~♡♡♡

2019-01-22 18:47:18

한주연

항상 밝은얼굴로 법당에서 뵐수 있어서 좋습니다요~~~보살님! 멋져요^^♡♡♡

2019-01-16 11:44:37

무량덕

꾸준히 수행의 줄을 놓지 않고 잘 쓰이는 모습이 정말 감동입니다. 도반이 수행의 전부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2019-01-15 15: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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