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특집] 대중법사님 이야기
월광법사님 첫 번째 이야기
길거리에 있을 때 가장 빛나요

월광법사님에게 길은 배움의 장소이고, 치유의 장소입니다. 길에서 만나는 이들의 한 마디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었고, 세상의 아픔은 참회할 대상이었습니다. 오늘도 가장 소외되고 어두운 곳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달빛처럼 은은한 자비를 실천하시는 월광법사님의 첫 번째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비로운 미소의 월광법사님
▲ 자비로운 미소의 월광법사님

인연, 자비의 실천

1995년에 같은 아파트의 이웃이 <월간정토>를 주었습니다. 거기에서 법륜스님의 첫 번째 인도 방문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아이를 안고 분유를 사달라고 구걸하던 여인을 따라 구멍가게에 갔던 이야기입니다. 당시 스님께서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1루피 이상 주지 말라는 사전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60루피라는 분유 가격이 큰돈인 줄 알고 도망쳐 나왔는데, 알고 보니 우리나라 돈으로 겨우 2400원. 스님은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다시 그 여인을 찾아 골목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그때부터 인도의 구걸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불교가 자비의 실천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던 차에 그 기사가 제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스님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참회가 가져다준 변화

그 후 부산 동래법당에서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매주 금요일이면 창원에서 부산까지 3시간 30분씩 걸려 다녔습니다. 그때 <금강경> 강의를 들으며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시댁과의 관계였습니다.

남편과 저는 초등학교 동창생으로 한고향 친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시댁 식구들이 얼마나 좋은지 다 알고 결혼을 했습니다.

큰아이를 낳고 시어머니께서 일주일동안 하루에 여섯 번 메뉴를 바꿔가며 정성껏 끓여 주신 미역국을 받아먹으며,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갚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그 이후 남편의 직장을 서울과 창원 두 곳 중에서 고르게 되어, 제가 선택해서 시댁이 가까운 마산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시댁에 가고 보약과 선물, 제사를 챙겼습니다. 그러던 어느해 추석에 친정 올케도 몸이 아프고 어머니도 건강이 좋지 않아서 제가 시댁과 친정의 차례 음식을 함께 준비했는데 시어머니께서 그것을 아시고 “네가 무엇 때문에 친정 제사 음식을 하느냐?"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화가 나서 시어머니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다 크면 출가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금강경> 첫 강의를 듣고는 이게 시어머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바라는 마음이 문제였음을 알고 시어머니께 찾아가 참회하고 화해했습니다.

저의 또 다른 고민은 십 년간 지속된 아들의 야뇨증이었습니다. 한의원이나 소아과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아이의 증세는 계속되었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우리 아이의 병을 내가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들이 똑똑하니 판사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는데, 그 소망 때문에 아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야단치고 혼냈던 것입니다. 고칠 사람은 아들이 아니고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스님의 가르침대로 명심문을 받아 매일 새벽 5시에 108배 참회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100일을 하고, 일주일째에 아들의 야뇨증은 거짓말처럼 없어졌습니다. 너무 기뻐 ‘제가 부처님께 이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이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평화를 기원합니다.
▲ 평화를 기원합니다.

눈물로 호소하는 스님의 간절함이 마음에 와 닿다.

남편 월급을 아껴 매달 JTS 후원금을 내던 중에 ‘내 힘으로 돕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전 직장에서 국군병원 기능직에 응시해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기능직에 합격해서 국군마산병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에 우수 공무원에게 주는 특별상여금 제도가 처음 생겼는데, 1996년 12월에 제가 그 상여금 46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날 부산 동래법당에 가니 스님께서 ‘지금 우리 동포가 다 굶어 죽는다. 직장인은 사직계를 내고, 대학생들은 휴학계를 내서 동포를 살려야 된다’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는 얼마를 낼까 고민하다 ‘에라 모르겠다. 반만 내자’, 하면서 23만 원을 넣어서 드렸습니다. 그때 스님의 나가시던 모습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다음날 출근해서 직장 군 법당에서 삼배를 하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북한 어린이들을 더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륜 스님께서는 매주 내려오셔서 북한의 대기근에 대한 참상을 알리며 우리 동포들이 굶어 죽고 있다며 눈물로 호소하셨습니다. 그 모습에 감복해서 저도 모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만나기 싫어도 다니면서 후원금을 받고, 아는 사람이 다 떨어지니 그다음엔 거리로 나가 모금했습니다. 그렇게 자원봉사를 시작 했습니다.

추운 겨울 도반들과 기도를 마치고
▲ 추운 겨울 도반들과 기도를 마치고

통일기도의 시작

스님은 정말 많이 우셨습니다.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1999년까지 북한의 고난의 행군 동안 300만 명이 굶어 죽자, 이렇게 동포가 죽는 걸 외면하는 건 우리가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라며, 스님께서는 주말마다 역사 강의를 하셨습니다.

서초법당 3층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을 선실에 모셔놓고 2000년 3월 1일부터 우리는 천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 릴레이는 그것대로 하고, 주말 역사 강의가 끝나면 철야 정진을 했습니다. 저는 그때 ’내가 마산에 있으니 멀어서 못 온다하면 서울 사람도 또 못 올 이유가 있지 않겠나. 내가 멀다는 이유로 오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북한 어린이가 굶어 죽는다는 것을 알고도 못 살려 냈고 모르는 역사도 배울 겸, 역사 강의 하는 일곱 번 만이라도 와서 철야정진을 하자’고 다짐하고, 일곱 번을 올라와서 스님 법문을 듣고 철야정진도 하고 내려갔었습니다. 일곱 번을 마치니 유수스님께서 천일 철야정진을 다 다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매주 마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철야정진을 하고 내려갔었습니다. 그렇게 1차 통일 기도를 시작했고, 회향하는 날 상도 받았습니다.

정토회 JTS 거리모금을 시작하신 법사님, 도반들과 함께
▲ 정토회 JTS 거리모금을 시작하신 법사님, 도반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하면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내는구나!

북한지원이 원활하던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으로 우리 정부의 지원이 완전히 중단되었습니다. 당시 정토회에서는 ‘백만인 서명운동’을 하며 서명과 모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산지역은 북한을 돕는다는 것에 대한 반발이 커서, 저는 남편과 고등학교 동기이고, 평소 다른 단체에도 후원하고 있는 한의사를 찾아갔습니다. 한의원을 방문하는 분들께 서명을 받게 해 달라고 부탁하니, 서명판을 집어던지며 “나 못한다!” 이러는 겁니다.

믿었던 분에게 거절당하니 막막해지며, 어찌할까 생각해보니 제가 잘하는 게 철야정진이었습니다. 마산법당 근처 3·1 만세운동을 했던 거리에서 21일간 철야정진을 하면서 서명을 받았습니다.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계속 절을 했습니다. 근처 술집 아가씨들이 오다가다 제가 계속 절하는 것을 보더니 모금을 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룻저녁에 10만 원 이상, 21일 동안 200만 원 이상 모금이 되었고 서명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처럼, 21일째 되는 마지막 날 저녁에 그 한의사가 나타났습니다. 혼자서 밤새 기도하는데, 그분이 “뭐하노!”하는데, 저는 미워했던 건 다 없어지고 “어머, 원장님!” 했습니다. 그 분은 남편 밥 안 해주고 뭐하냐고 하면서 만 원을 넣어주고 갔습니다.

한번은 비가 와서 자리를 옮겨서 기도하고 있는데 어떤 술 취한 사람이 ’아줌마, 뭐 때문에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해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하였습니다. 그때 그렇게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내는구나. ‘이게 기적이구나!’를 기도하면서 느꼈습니다. 그 체험을 통해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 배웠습니다.

▲ 월광 법사님 이야기

1인 시위

그래도 결국 2010년 천안함 사건이 일어나고, 연평도 포격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천일기도 회향하고 나면 쉬는 그 기간에 터진 것이었습니다. 3년 만에 쉬는데 또 기도하자고 할 수 없으니 혼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철야정진을 해봤으니 기도가 제일 쉽잖아요?

혼자라도 광화문 가서 기도를 하겠다고 했더니, 스님께서 "추운데 길거리에 내보내야 하니 마음이 아프다" 하시며 조계사를 알아봐주셨습니다. 조계사에서 허락은 받았는데 당시 시민들의 반응이 너무 거세니까 일주일만 기다려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이미 계획을 잡았으니 광화문에 가서 12월 25일부터 7일간 기도를 했습니다. 스님께서 "혼자서 하루 10시간 기도를 할 수 있겠나?" 물으셨는데 제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첫날은 날씨가 무척 추웠습니다. 스님께서는 1인 시위니까 아무도 옆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날 날이 추워서 스님도 울고 동행한 도반들도 다 울었습니다. 그 주변을 돌면서, 사람들이 도시락도 싸주고, 차도 태워주고, 경찰관이 손난로를 주기도 했습니다. 제가 화장실을 갔다 오면 또 누군가 그 자리를 메워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다 ‘기도는 하기로 한 것보다 더 하는 게 기도’라는 스님 말씀이 생각나서 연말을 지나 연시까지 기도했습니다. 다음 해 1월 3일 10시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정부 시무식과 같이 기도가 끝났습니다.

추운 날씨라서 옷도 많이 입고, 장갑도 두 개 세 개 끼고 절을 해서 생각보다 많이 춥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은 많이 시렸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날 수 있고 북한에 굶어 죽는 동포를 생각하면 못할 게 없었습니다. 하기로 한 날짜보다 기도를 더 할 수 있었던 건 도반들의 격려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어떻게 했겠어요.

광화문 1인 시위
▲ 광화문 1인 시위

어미의 심정으로 북한의 인도적 지원을 호소하며, 청와대앞 정진기도 중
▲ 어미의 심정으로 북한의 인도적 지원을 호소하며, 청와대앞 정진기도 중

임진각 기도, 기적

기도하면 진짜 모두가 돕는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3월 1일 기념식 하고 기도 발원문 챙겨가지고 3일간 청와대에서 1인 시위를 했습니다. 화장실 가는 시간 포함해서 하루 11시간 씩 3일동안 청와대 앞에서 했는데, 신원 확인 하는 담당자가 바뀔 때 마다 계속 여기서 뭐하냐고 물었습니다. 또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아져서 편안하게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부처님께서 국경 변에서 전쟁을 막으셨던 것이 떠올랐고, 그렇게 ‘임진각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같이 봉사도 하고, 옷도 사주고, 도시락도 싸준 일산에 사는 도반 두 분이 있었습니다. ‘우리, 바보 셋이 기도를 하자.’하며 시작했습니다. 바보 셋이 머리를 맞대면 문수의 지혜가 나온다고 어느 스님이 하신 말씀이 있었거든요. 임진각에서 ‘7천만 민족을 대신해서 참회합니다.’ 하며 2시간 동안 300배 정진하고 40분 평화 명상까지 했습니다. 한번은 외국인들이 와서 함께 기도하기도 하고,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아픔도 알게 되는 등 감동적인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때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지 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일로 생각하면 무거운데, 그걸 왜 해야 하는지를 알면 그냥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도와주는 사람도 정말 많고. 참회하며 온몸을 낮춰 절을 하니 비난했던 사람들의 마음도 알게 됩니다. 도리어 그분들에게도 정말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니까 비난하다가도 다시 도와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기도하면서 하면 나부터 평화로워집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통일기도를 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사천왕사지 기도도 그런 마음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산이 제 고향이니 봉림사지에서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강화도와 철원도 시작하더군요. 임진각의 기도가 뻗어나가는 것을 보며 ’스님의 가르침이 씨앗이 되어 품고 있구나. 누구에게라도 알리면 변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길거리에 있을 때 가장 빛난다고 말해준 아들

백일기도 실천 과제가 ‘밥 한 공기 나누기’였던 적이 있습니다. 천 원씩 모아 북한 돕기를 하는 것인데, 그때 6학년이었던 아들이 같이 따라다녔습니다. 엄마가 모금하러 다니는데, 안 주는 사람이 많으니 보면서 안쓰러웠나 봅니다. “엄마, 다음 생에는 미국에서 제일 부잣집 딸로 태어나서 어려운 사람 마음껏 도와주세요.”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또 아들이 고등학교 때 제가 마산 창동에서 밤마다 모금을 했는데, 친구들이랑 지나가다 모금하는 모습을 본 겁니다.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엄마, 엄마는 정토회에서 높은 사람 되지 마세요. 길거리에 있을 때 가장 빛나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자식 낳아서 아들한테 내가 받을 거 다 받았다. 이제 이것만으로도 감사하다’ 했습니다.

거리에 있을때 가장 빛나는 당신!
▲ 거리에 있을때 가장 빛나는 당신!

말 그대로 '길거리에 있을 때 가장 빛나는 월광법사님'의 이야기를 통해 정토행자의 통일기도의 역사를 되짚어봤습니다. 철야정진이 제일 쉽다며 밝게 웃으시는 법사님의 미소에서 행복이 묻어납니다. 내일 이 시간은 월광법사님의 가족과 다문화센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속기_박선영 리포터 (진주정토회 사천법당)
사진_구자흥 리포터 (창원정토회 의창법당)
녹취_정명숙 리포터 (마산정토회 마산법당)
편집_목인숙 (경남지부)
도움주신이_장은미, 전은정(온라인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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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

법사님 기도드립니다. 🙏

2023-10-08 11:22:52

장춘희

만나면 늘 자애로운 미소와 다정한 말씀 건네주시던 월광법사님...쾌차하시길 기도할께요. ㅠㅠ _()_

2023-10-08 10:53:35

광명심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고개가 숙여지고 눈물이 났습니다.
저도 부지런히 꾸준히 수행정진하겠습니다.

2022-02-11 1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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