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특집] 대중법사님 이야기
법광법사님 두 번째 이야기
거울에 비추어 어리석음을 깨우치다

부모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남편을 원망하던 제가 정토회를 만나 어리석음에서 깨어났습니다. 지도법사 님의 바른 가르침을 배우며, 여러 법사 님이 이끌어주시고 도반들이 거울에 비춰준 덕분입니다. 나이가 들어 육체적으로는 약해졌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마음이 힘든 사람들에게 저처럼 어리석었던 사람도 행복해졌으니 힘내라고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인터뷰중인 법사님
▲ 인터뷰중인 법사님

봉사, 나를 뛰어넘는 디딤돌

보시와 봉사,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어느 천년에 돈을 벌겠는가. 지금부터 저분들을 따라서 해보자’ 결정 하고 묘수법사님께 뜻을 전하니 홍제동 <월간정토> 사무실로 오라 하였습니다. 처음 주어진 일감은 <월간정토> 구독 신청 전화를 받아 주소를 적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글을 모르니 전화벨만 울리면 다른 곳으로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묘수법사님께서 “왜 도망가요?” 하시기에 “글을 몰라서요….”라고 답하니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럼 할 일이 있어요. 홍보하세요, 홍보.”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월간정토> 100권을 표지가 잘 보이도록 품 안에 안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명동, 소공동, 인사동, 남영동, 충무로 등 사람 많은 곳의 구청, 동사무소, 은행을 돌며 <월간정토>를 비치했습니다. 인사동 전통찻집과 조계사 앞 서점에도 매 달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찾아가서 인사하고 책 나눠주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사무실에 와서 “동사무소에서 보고 <월간정토> 신청한대요” 또는 “어느 은행에서 봤대요.” 하면 저절로 힘이 솟고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봉사 첫 인연 월간정토
▲ 봉사 첫 인연 월간정토

3개월쯤 홍보하자 묘수법사님께서 전동타자기를 주시며 한글을 익히도록 권해주었습니다. 몇 날 며칠 자판을 두드려도 글자가 만들어지지 않아 애태우는 모습을 보시더니, 법사님께서 컴퓨터 자판으로 익혀보자 하였습니다. 치고 또 치고 며칠의 연습 끝에 드디어 글자가 만들어졌습니다. 너무 기뻐서 저도 모르게 법사님을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법사님, 글이 돼요.” 컴퓨터 자판을 이용해 글을 쓸 수 있게 되자 전동타자기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차츰 글을 익히게 되어 <월간정토>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글을 몰라 우체국도 못 가던 제가 <월간정토> 봉투에 주소를 쳐서 우표를 붙이고 우체국에 가서 보내는 작업을 하게 되니 신바람이 나서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글자를 익히게 되자 전화받는 일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기계로 글을 익힌 터라 손으로 쓰는 일은 여전히 잘 되지 않았습니다. 굳어진 손가락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쓴다고 써도 제가 쓴 글을 제가 읽기도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전화를 받을 때, 긴장하니 목소리가 커지고 큰 목소리로 몇 번이나 되물어가며 온 힘을 기울여 또박또박 썼습니다. 소리를 지르다시피 일을 해도 아무도 시끄럽다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대로 행복합니다*_*
▲ 지금 이대로 행복합니다*_*

소임, 점점 커져가는 기쁨

받아 적는 것도 가능해졌을 때 또 다른 걸림돌이 생겼습니다. 어찌어찌 쓴 글씨가 다른 봉사자의 단정한 글씨와 비교 되는 것이었습니다. 못난이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고 창피해서 이면지에 받아 적었던 주소를 공책에 연필로 옮겨 적으며 구멍이 날 정도로 지웠다 쓰기를 반복했습니다. 또다시 열등의식과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회원카드를 작성하다가도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 번 찢고 참회하기를 되풀이했습니다. 어찌나 속상한지 눈물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게 욕심인지도 모르고 욕심을 부렸던 겁니다. 이러지 말고 글공부를 먼저 할까 생각했지만, 글을 잘 쓰게 되기까지 그 세월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봉사할 수 있는 만큼만 뭐든지 배워서 이 자리에서 봉사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손으로 주소록 쓰는 것을 자신 없어하는 제게 법사님은 만기 회원들에게 전화해서 구독 연장 신청을 받는 업무를 권했습니다. 전화로 설문 조사도 하고 연장 신청도 받으면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기쁘게 일을 하다 보니 통화하는 사람도 좋아했습니다. 법륜스님께서 전화받는 업무 잘한다고 칭찬도 해주셨습니다. 나중에는 회원관리와 책자를 발송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회원관리와 수시발송, 매월 15,000부의 정기발송을 혼자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연화회 도반들과 여러 봉사자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해냈습니다!!
▲ 결국 해냈습니다!!

남편, 나를 깨우는 사람

정토회에 다니면서도 집을 나가려고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여기가 절인데 또 어데로 가노!” 하시며 "남편에게 미운 마음이 없어지면 그때 이곳을 떠나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봉사 시작하고 정토회로 출퇴근하면서 10년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정진하던 중 ‘내가 남편을 잘못 봤구나.’ 깨달아지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동안 남편이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는데 남편 말을 스스로 비꼬아 듣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알아도 습관은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가는 것, 또 반복했지만 금방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알면서도 또 그러는구나.’ 하고 알아차림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제는 남편의 그 어떤 행동과 말도 이해가 되고 편안합니다.

밤새 불 켠 채 잠이 들고, 고두례(叩頭禮) 자세로 잠이 들어도

1997년 대홍수 피해를 입은 북한 주민에게 식량 100만 톤 지원을 위한 '100만 인 서명운동'을 했습니다. 정토회는 법당에 기도자 한 명만 남기고, 모든 법사님과 실무자들이 사무실 문을 닫고 하루 한 끼는 굶으며 북한 돕기 전국 서명운동에 나섰습니다. 저는 서명판 10개를 들고 하루에 1,000명씩 서명을 받았습니다. 49일 동안 10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정부에 전달했지만 식량 지원은 15톤에 그쳤습니다. 스님은 ‘북한 주민 300만 명이 죽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야 한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스승과의 만남에 더욱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정토회는 홍제동에서 계동, 양재동, 그리고 서초법당으로 사무실을 옮겼습니다. 저는 용두리에서 서초법당 2층 사무실까지 왕복 4시간을 출퇴근했습니다. 오전 8시 50분까지 사무실에 도착해 여는 모임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밤 11시에 퇴근했습니다. 용두리 집에 도착하면 새벽 1시를 넘는 날이 많았습니다. 형광등을 미처 못 끄고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밤새 불을 켠 채 자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아침이면 어느새 버스에 몸을 싣고 출근하고 있었습니다. 꾸준한 기도와 매주 듣는 법문 덕분이었습니다. 때론 108배 마치고 고두례 자세로 잠이 들어 몸이 굳기도 했지만 기도할 수 있음에 뿌듯했습니다.

1999년 백일법문 때는 매일 법문을 듣고, 회원 관리와 정토출판총무 서점관리 소임에 더해 100여 건의 <월간정토> 추가 발송과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회원제 테이프' 추가 발송과 '금강경 반야심경 법문세트' 매일 매일 수시 택배포장 50~70개 발송을 하며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습니다. 백일법문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알게 된 것은 남편과 도반들을 분별하는 것이 뿌리 깊은 열등감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확 고쳐버리지는 못해도 부끄러워할 수 있었던 수행 정진의 기간이었습니다.

소중한 인연입니다
▲ 소중한 인연입니다

병사들의 자살을 막고싶어 만든 행복도서 나눔통장

2005년 에코붓다에서 주도하는 ‘음식 남기지 않기 100만 인 캠페인’의 강사로 자원해 전국을 누비며 ‘밥그릇 닦아 먹기’ 운동을 전파했습니다. 어린 시절 며칠씩 밥을 먹지 못해 일어나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부족하지만 기꺼이 먹을 것을 나누어주던 사람들에게 받은 고마움을 세상에 돌려주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전국 군부대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강연을 했습니다.

어느 부대에서 2시간 강의를 마치고 대대장과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대대장이 병사들의 자살을 이야기했습니다. 해마다 적잖은 수의 병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그 말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20대 젊은 청년들의 자살을 줄일 방법이 없을까? 가슴이 답답하고 속에 무언가 걸린 듯 견딜 수가 없어서 서초법당에 갔습니다. ‘부처님, 저 청년들을 어쩔까요?’ 한 배 한 배 간절함을 담아 밤새도록 절을 했습니다. 그렇게 삼천배를 마치고 ‘그래, 법륜스님의 책을 보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토출판 국장님과 정토회 재산관리부부서(모금에 동참하는 분들 연말소득공제해택을 수 있게 하기 위함) 제안 '행복 도서 나눔 통장'을 만들어 군부대와 교도소에 책 보내기위해 전국 40여개의 정토회법당에 도서담당보살님들에게 홍보안내문구를 만들어 보내고 함께 모금을 했습니다. 그때 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정토회천일결사에 지인 입재 시키기와 책 보내기 모금과 책을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주어지는 그 자리에서 연구하고 연구한다.

6차 천일결사부터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매주 출퇴근하며 <깨달음의장> 돕는 이를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깨달음의장> 참가자 다수가 정토회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청소 시간이 되면 ‘날마다 웃는 집’ 홍보 티셔츠를 입고 천일결사 입재를을 위한 백일의 약속 권유홍보와 군부대 도서 보내기 모금을 했습니다. 법륜스님 전국 강연에 참여하도록 홍보하는 것 또한 중요하게 생각한 활동이었 때문입니다. 수련마치고 일반인인 다수 수련생들은 전국 지역법당에 법회에 나갈 수 있게 총무님 또는 법회담당자님들에게 연결해주고 법당 없는 곳에 사는 수련생들에게는 인터넷법회 담당자님에게 연결하기도 하며 천일결사 입재식이 임박한때는 그 수련생들이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지역 입재식 출발차량을 탑승하도록 안내전화를 하는 것도 신이났던 일이었습니다. 그 시절 정말 쉴 틈 없이 연구했습니다. 그렇지만 군부대 책 기증식에는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모금만 되면 책은 누구라도 보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6차 천일을 마치고 7차 천일 결사에 들어 문경 정토수련원의 <명상수련> 총괄업무 소임을 1년 9개월, 지리산 정토수련원 <깨달음의장> 운영총괄을 1년 11개월 하면서 법사 과정인 행자교육을 받았습니다. 법사는 지금까지 많이 배웠고 앞으로도 많이 배우겠다는 마음을 내는 일임을 받아들이면서 부족하지만 법사가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법사입니다
▲ 오늘부터 법사입니다

수행과 깨달음의 소중함을 전해주시는 법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온몸을 진흙탕에 내던져 부처님이 지나가실 길을 만든 수메다 존자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정토세상은 특별한 능력이 아닌 간절한 마음이 담긴 일상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법사님이 몸소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법광법사님~" 하고 부르면 언제나 밝은 미소와 편안함으로 화답하시 듯, 법사님은 인터뷰 내내 환한 모습으로 법만난 기쁨을 전해주셨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법사님은 자신의 수행기간을 돌아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하셨습니다. 때로는 안타까운 탄식을 하고, 때로는 박장대소하며 법사님과 함께 한 희망리포터들에게도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법사님의 이야기를 읽는 여러분도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법광법사님은 현재 군부대전법전문법사 소임과 강원경기동부지부 원주정토회 담당법사 소임을 맡고 계십니다.

글_이영선 희망리포터(분당정토회 경기광주법당)
편집_전선희(강원경기동부지부)
속기_이현주 희망리포터(남양주 양평법당) 나현미(수원정토회 수원법당)
도움주신 이_이미정 희망리포터(용인정토회 기흥법당) 장석진(강원경기동부지부)

전체댓글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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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만옥

법사님 .... 너무나 힘든 과정을 겪으셨다는게 글을 읽으면서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저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

2024-02-25 15:11:29

이원희

법사님의 진솔하고 살아있는 수행담 눈물이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2019-02-04 10:37:41

박영희

법사님 진솔한 수행담 눈물이납니다. 그 어려움을 봉사로 극복하신 삶이 아름답습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2019-02-04 10: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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