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사하법당
머리에서 가슴으로 다가온 행복
김정숙 님의 삶과 수행

12월 말 법당에서 김정숙 님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귀감이 되는 법문과도 같았습니다. 그날의 감동을 고스란히 글로 풀어내기가 턱없이 부족함을 느끼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그날 받았던 깊은 울림을 전하려 합니다. 지식을 통한 앎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사하법당 저녁부 책임 팀장 김정숙 님의 삶과 수행담을 전해드립니다.

사하법당에서 김정숙 님의 해맑은 모습
▲ 사하법당에서 김정숙 님의 해맑은 모습

삶이 애초에 어려운 것인가 묻는 친구에게

저는 삶을 늘 내가 결정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마흔일 때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제가 6살 되던 해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가장역할을 잘 못 하셨고 오빠도 중학교 2학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모든 일을 스스로 개척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람을 경계하며 가까이 지내지 않고 산을 좋아했습니다. 장사도 해보았고 좋은 회사도 다녔는데 산에 다니기 위해 방학이 있는 학교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그러다 산악회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결혼할 때 남편이 돈은 못 벌어도 건강관리는 잘해주길 바랐지만, 남편은 사회성이 무척이나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산책을 좋아해서 공원 근처에 집을 구했는데 남편이 만날 술 마시고 손님을 데리고 집으로 오고 해서 산책도 잘 다니지 못했습니다. 임신도 하였는데 결혼 후 1년 내내 울었던 것 같습니다. 독립적인 성격이라 어머니나 주변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친구의 권유로 <깨달음의 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깨달음의 장>은 등불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하길 바랐던 것’이 인생의 좌표가 되었습니다.

1996년 12월 겨울, <깨달음의 장>에서 - 맨 아래 우측에서 두 번째가 김정숙 님
▲ 1996년 12월 겨울, <깨달음의 장>에서 - 맨 아래 우측에서 두 번째가 김정숙 님

행복을 찾아서

첫째 아이가 태어난 1996년 12월 말에 문경으로 <깨달음의 장>을 다녀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법륜스님께서 직접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 인연으로 <나눔의 장>도 다녀오고 스님께서 직접 금강경과 육조단경 강의를 하는 부산 동래법당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99년 3월 불교대학에 입학해서 3-9차 때 입재하여 새벽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부산 성불사 각해 보살님께 누구나 기도문을 받아 수행 할 수 있었는데 혜안이 있으신 보살님께서 저에게 주신 기도문은 ‘남편에게 공손히 하는 아내가 되겠습니다’였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하는 3일째 되는 날, 남편이 기도를 못 하게 하였습니다. 기도문에 따르면 남편 말을 들어야 했고 그런데 기도를 하기로 했으니 기도는 해야 하는 그 상황이 굉장히 모순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법륜스님과 독대하며 기도문을 잘 지키고 있는지 개인점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스님께 질문하였는데 스님의 가르침이 지금도 큰 지침이 됩니다. 스님께서는 “남편에게 공손히 한다는 게 남편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건지 아니면 안 하는 건지 잘 보아라” 하시며 “네가 하고 싶고 옳은 일인데 남편이 하지 말라고 해서 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무엇이 안 될 때마다 남편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공손히 하는 게 아니다. 그냥 네가 옳다고 생각하고 하기로 한 것은 나쁜 일이 아니면 하고, 야단을 치면 시킨 대로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까 야단을 맞으면 되지 않느냐” 하시며 숙이고 살면 남편도 나에게 큰소리치는 것이니 기가 살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그때 스님의 말씀은 ‘공손히 한다는 것’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광화문 평화시민대회에서 옆지기 남편과 함께
▲ 광화문 평화시민대회에서 옆지기 남편과 함께

2000년도에는 상담심리 관련한 대학원에 진학해서 초월영성을 공부하며 지식의 길로 가는 깨달음을 체득했습니다. 아이들을 재우고 새벽 늦게까지 공부를 하느라 새벽 수행은 못 하였지만 공부하는 그 자체가 수행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어렵다던 박사과정도 원활히 합격하고 삶이 순탄하게 풀리는 듯했습니다. 나 자신이 잔잔한 호수처럼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둘째 아이가 스무 살이 되면 인도의 수행공동체에 들어가서 수행자로서 살려고 했습니다.

아픔을 버팀목 삼아 노래하며 건너가라

인도로 가기 전 <깨달음의 장>을 통해 빚진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을 갚고자 사하법당을 찾고 있었지만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사하구청에서 법륜스님의 희망강연이 있었는데 스승님께서 오신다고 하니 오랜만에 얼굴도 뵙고 잘 지낸다고 인사도 하고 행복의 길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도 전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갔는데 제 눈엔 법륜스님의 모습이 세월이 흘러 연세가 드셨고 전국 강연으로 지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때 다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나 같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저렇게 힘들게 다니시는데 나는 반짝반짝 빛나 보이고 행복해졌다고 잘난 줄 알고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게 부끄러워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적극적으로 사하법당을 찾았고 배운다기보다는 봉사를 하기 위해 2014년에 불교대학 학생으로 재입학하며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2015년 사하법당 봄불대 입학식에서 - 맨 아래 왼쪽에서 4번째가 김정숙 님
▲ 2015년 사하법당 봄불대 입학식에서 - 맨 아래 왼쪽에서 4번째가 김정숙 님

7-4차 때 재입재를 하며 적극적으로 수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5분 이상 늦어질 경우 전기충격기를 대신하여 JTS 거리모금에 100만 원을 기부하기로 결심하며 새벽 5시 기도 시간을 지키려 했습니다. 2주 만에 기도 시간을 3번 어기고 300만 원을 기부한 후 7-10차부터는 새벽 5시 기도 시간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올빼미형 생활에서 새벽형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던중 불교대학 담당자가 바쁜 모습을 보고 저도 무언가 도와주고 싶기도 하여 맡게 된 첫 소임은 천일결사 모둠장이었습니다. 사하법당에서 2015년 경전반 학생일 때는 불교대학 담당자 소임을 맡게 되었는데 선임자가 없고 봉사경험도 없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어려웠습니다. 좁은 법당에 입학한 학생이 50명이나 되었습니다. 혼자 간식 준비하고 법문 열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는데 하필이면 메르스 사태로 학생들이 줄줄이 법당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학생들이 오지 않는 것이 마치 제 문제인 듯 여겨졌고 도반들 마음을 살피는 게 힘들기도 하여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처음 법당에 오신 분들이 수행자로서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보람도 느꼈고 내 수행에도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도반의 소중함을 알기 시작하였습니다.

황옥선 님과 가을불교대학 홍보 중 - 오른쪽이 김정숙 님
▲ 황옥선 님과 가을불교대학 홍보 중 - 오른쪽이 김정숙 님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을까

빚진 마음을 갚고자 3년간 정토회에서 봉사하고 떠나려 했던 마음이 바뀌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2015년 경전반 학생일 때 정회원이 되어 정일사에 참여하고 당시 사하법당에서 저녁부 수요법회를 담당하던 황옥선 님과 함께 새벽에 동래법당에 가서 49일 동안 새물정진 300배를 하였습니다. 새벽에 나가 동래법당에서 300배를 하고 서둘러 멀리까지 출근하는 도반의 모습을 보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떠나야 한다는 마음에 소임이 주어지면 냉정하게 거절했는데 새물정진을 통해 소명의식이 생겨 사하법당의 저녁 책임 팀장을 맡아 저녁부를 일으키고자 했습니다.

2016년 2월부터는 황옥선 님과 법당에서 새벽예불을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묵묵히 새벽예불을 함께하는 황옥선 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정회원 2명에서 현재 근 30명이 되고 맨바닥에서 시작한 저녁부가 튼튼해지고 안정되어가는 모습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명상과 관련한 공부로 인해 머리만 자꾸 커지고 가슴은 차가워짐을 알게 되어, 머리를 잘라야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겠다고 받아들였습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연기적 세계관을 수행과 봉사를 통해 가슴으로 느끼며 제 마음은 따뜻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빚을 갚으러 왔지만 빚은 갚을 수 없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봉사라는 건 단어만 봉사이지 실은 수행이었습니다. 봉사를 하며 오히려 내게 덕이 되니 빚으로 남을 뿐 갚는 게 아니었습니다. 법당에서 수행과 봉사를 하며 가슴이 따뜻해지고 머릿속의 지식이 몸으로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첫사랑과 같은 지리산에서 김정숙 님
▲ 첫사랑과 같은 지리산에서 김정숙 님

사람보다 산을 더 좋아했던 기본 성품에서 이제는 도반들과 함께하며 기쁨과 행복을 나누는 사람다워진 지금의 내가 좋습니다. 요즘은 도반들을 보며 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도반들을 보면 자꾸만 눈물이 나려 합니다. 통일정진 300배 하는 뒷모습만 보아도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감동적이어서 그냥 눈물이 납니다. 떠나려 했던 그 마음은 떠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수행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가 최고의 수행처입니다.

나의 도반들에게

무슨 일이든 늘 함께 해주어 고맙고 소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도반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점이 있다면 용서해주었으면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마지막 목적지까지 넘어지면 서로 손 내밀어주어 손잡고 수행자의 길 같이 가길 기도드립니다. 소중한 도반님들이 제 수행의 전부임을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이렇게 김정숙 님을 만나게 되어 제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가장 나다운 내가 가장 당신다운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언제나 행복입니다. 그 아픔까지도 말입니다.

글_김형석 희망리포터(사하정토회 사하법당)
편집_방현주(부산울산지부)

전체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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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호

감사합니다.

2019-04-29 12:39:51

자재왕

빚을 갚으려해도 봉사는 나의 덕을 지으러가는것이니, 결국 늘 빚을진다는 말씀과 공감의 눈물이 납니다. 잘 들었습니다.

2019-01-03 18:53:36

수승화

멋지세요

2018-01-13 08: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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