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밀려오는 파도에 송두리째 뽑히지 않도록

<월간정토>에 수록되는 다양한 글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백일출가 수행담입니다. 아마도 주인공(?)이 100일이라는 시간동안 고난과 역경을 뚫고, 참 많이 변하는 역동적이면서 감동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수행담 역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몰입해서 글을 휘리릭 읽고 나면, 진한 감동이 탁 치고 올라옵니다. 그러면 이게 또 중독성이 있어서 다른 이야기도 또 읽고 싶어집니다. 이 글을 읽고 만약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면, 정토회 행자원의 '백일출가 네이버 블로그'도 방문해 보세요.

처음 만난 파도

보잘것없던 내 삶에도 한 줄기 빛이 비치던 때가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열망이 있던 내게 과분한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인디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꿈만 컸지, 애니메이션이란 것을 만들어본 적도 없었고 3분 이상의 영상 제작 경험도 없어서 뮤직비디오를 완성하는 자체가 버거웠다. 주어진 시간 안에 제작하려면 내 조건에 맞춰야 했는데, 그렇게 하기엔 내가 욕심이 많았다. 하고 싶은 것을 다 넣어 기획하는 바람에 작업하는 내내 초기 기획을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그런 과정에서 완성도를 기대할 순 없었으므로 작업하는 5개월 동안 서서히 망해가는 걸 느꼈고, 구렁텅이에 빠지는 걸 알면서도 내 업식대로 행하였다.

작업이 망하고 한동안 영상 작업을 하지 못했다. 창의력을 요구하는 어떤 작업도 손을 댈 수 없었다. 당시 내가 힘들어 보였는지 제작을 의뢰한 가수가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책을 선물해 주었다. 친구들도 나를 끌어올려 주려고 손을 뻗어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더 깊게 허우적거렸다. 큰 파도에 부딪힐 때 다시 일어서는 힘을 기르고 싶었다. 그즈음 뇌 과학 분야를 섭렵했다. ‘회복탄력성’과 ‘전두엽 활성화’ ‘내면 소통’, ‘호흡 명상’ 등 나를 수련할 방법에 대해 찾아보고 연구했다. 그렇게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법륜스님을 알게 되었다. 스님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면서 참 젊은 사고를 하는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위로받을 수 있는 어른을 만난 것이 기뻤다.

나는 당시 삶에 대한 깊은 허무함을 느끼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 적으니 점점 약해져 갔다. 운동 부족으로 인해 여러 질환을 얻었다. 그중 하지 불안 증후군이 제일 골치 아팠다. 하체가 불안하고 계속 움직이게 되어 밤에 잠들기 힘들었다. 잠 못 드는 밤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채 제대로 된 하루를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몸이 힘들어도 좋으니 뜻깊은 일을 하면서 하루를 마치고, 잠들 때 아쉬움이 남지 않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다 백일출가 후기 글을 보게 되었다. 나를 괴롭히던 번뇌를 속세에 두고 절이라는 유유자적한 공간에서 오직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농사일 수행을 하는 것도 퍽 마음에 들었다. 지쳐 잠들고 싶던 내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으니까.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내 주변의 시간, 장소, 사람을 바꿔야 한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방법으로 백일출가가 가장 효율적으로 보였다.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었다가 등대를 만난 것과 같았다.

원력당에서(최하나 님)
▲ 원력당에서(최하나 님)

제 성질머리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법사님께 기도문을 받았을 땐 의아했다. 기도문은 ‘부모님, 내 성질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성질 받아줄 사람 없습니다’였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내가 성질을 부린다고? 나만큼 다른 사람 성질 받아주고 사는 사람 어디 있다고?’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부모님 성질을 받아주고 눈치 보면서 살았다고 생각했다. 1남 1녀 중 막내이지만 오빠와 한 살 차이라 그런지 큰딸 노릇을 도맡아 했다. 나도 의지할 곳이 필요한데 부모님이 내게 의지한다는 느낌이 참 버거웠고, 정서적 안식처가 되어주지 않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개인 정진 시간에 참회의 절을 하면서 어린 시절에 내 고집을 들어주려 애쓰시던 부모님이 떠올랐다. ‘내가 참 고집 세고 성질 더러웠구나! 부모님이 내 성질 받아주고 내 눈치 보고 사셨구나!’ 깨닫고 나서야 법사님이 주신 기도문이 가슴 깊이 이해됐다.

공양간에서 한창 일하던 중 공양주님께서 “행자님, 본인이 남의 말을 잘 듣는다고 생각해요?” 질문하셔서 ‘당연하죠’라고 생각하다 불현듯 깨달았다. ‘아, 나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구나!’ 정말로 나는 남의 말을 잘 안 듣는다. 마음 나누기를 할 때도 경청하는 태도지만,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다. 사람들 말이 잘 기억나지 않는 건 그냥 그 순간에 깨어있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냥 내 생각이 너무 옳아서 남의 말을 안 듣는 것 같다. 심리학과 철학을 조금 알고 있어서 사람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건방진 생각에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것은 평생 안고 가야 할 과제이다.

마음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

정토회 일원으로 살다 보면 내 마음을 꺼내야 하는 수많은 순간이 찾아온다. 참 싫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누구에게 내보일 수 있겠냐며 입안만 맴돌 뿐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애써서 내어본 마음도 다른 사람에 의해 평가받는다는 생각에 긴장되고 주저했다. 가장 혹독한 평가자는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나누기를 했어도, 하지 않았어도 나를 나무랐다. ‘왜 말 안 했어, 왜 말했어.’ 어차피 내게 혼날 거라면 말하고 혼나자는 마음으로 조금씩 내 마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백일출가 프로그램이었던 ‘나눔의 장’이 기억난다. 어찌어찌해서 겨우 내어놓았던 내 나누기에 속이 시원했던 경험. 그리고 서로에게 삼배하며 감사와 축언을 나눌 때 들었던 공감과 응원 그리고 진심 어린 조언까지, 그때 나는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축언으로 들었던 것 같다. 참 많이 위로받았다. 내 노력을 인정받고 싶던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남들이 아니라 나에게 듣고 싶던 말. ‘너 애썼다. 최선 다했다’ 그 말을 왜 나에게 하지 못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눔의 장을 하며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원 없이 들을 수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다르고 또 비슷한 삶이 이해되었다. 차례가 되었을 때 마음 깊이 숨겨두고 가끔 혼자만 꺼내 보던 이야기들을 내어놓고 나니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내 이야기가 별것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끌어안고 괴로워했다니 참 미련했구나! 탁, 놓아버리면 되는구나!’ 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내가 가벼워지는 방법이란 것을 그때 체득했다.

고라니밭 일수행(앞줄 가운데가 최하나 님)
▲ 고라니밭 일수행(앞줄 가운데가 최하나 님)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

백일출가를 하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욕심’이었다. 나는 욕심이 많다. 도반을 시비 분별할 때도 그 도반이 가진 것을 탐냈다. ‘저분은 나와 비슷한 성향인데 더 좋은 가정환경을 가졌네. 저분은 나처럼 인정욕구가 가득한데 나와 달리 그것을 얻어낼 체력을 가지고 있네. 저분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비교심이 솟구쳐 나를 자꾸 괴롭히곤 했다. 자신의 어리석은 면을 보는 건 참 괴롭다. 어리석음과 욕심은 비례하는 것 같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참 아둔하다. 내가 부럽다고 생각했던 도반들이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을 부러워할 때가 있다. 더 나은 것 없이 서로 다를 뿐인데 나는 내 손에 쥔 건 버리고 남의 손에 쥔 것만 탐했다.

NGO 탐방 때 만난 행자대학원 선배님의 나누기가 인상적이었다. 팥이 콩이 될 순 없다는 말. 나를 바꿀 순 없다. 다만 업식을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오는 연습을 하면 된다. 다시 돌아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만으로도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역경을 겪었지만, 이전 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탄력성’이라고 한다. 편안하게 신속히 돌아올 수 있도록 계속 연습해야겠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기를

회향 수련 때 46기 도반들이 준 선물은 대부분 건강에 대한 것이었다. "행자님은 건강관리를 잘했으면 좋겠어요." 병원에 가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도반들과 함께하는 일수행과 정진을 놓칠 때가 많았다. 그 부분이 가장 아쉬운 건 나였다.

만 배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첫 번째 병원행을 했다. 사유는 위장병이었다. 만 배를 하는 동안 위산이 역류하여 위출혈이 있었던 게 통증의 원인이었다. 출가 생활에 적응이 제대로 안 되었는지 새벽마다 잠이 깨어 수면의 질도 떨어지고, 밥도 불편하게 먹으며 계속 긴장 상태로 있었으니, 소화가 잘 안되었다. 위장병으로 병원에 간 나는 뜻밖의 것들을 알게 되었다. 위 질환으로 몇 주 만에 살이 5kg이나 빠져서 저체중에 다가간 것과 빈혈이 매우 심하다는 것이었다. 만 배를 하며 어지러웠던 것이 빈혈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나의 건강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비교적 건강한 다른 도반들을 보며 시기심을 느낄 때가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허약한 건지 자책감도 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부정적인 마음이 들 때마다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아, 나 또 욕심내고 있구나!’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이 가소롭기도 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과보를 달게 받을 줄 모르는 오만함이 얄미웠다. 체질적으로 허약하든 건강관리를 안 해서든 내게 온 과보를 달게 받으며 앞으로 이런 과보를 안 받도록 노력하며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백일출가는 무탈하게 마쳤지만 남은 재입재 기간 동안 주어진 과제들을 잘 수행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파도에 쉽게 휩쓸리며 정처 없이 표류하던 삶에서 파도에 흔들릴지언정 뿌리는 단단히 박힌 수행자의 삶을 살고 싶다. 그렇게 살다 보면 마침내 흔들림이 뜸해져 고요함으로 다가갈 것 같다. 앞으로의 내 모습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여래원 앞에서(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최하나 님)
▲ 여래원 앞에서(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최하나 님)


이 글은 <월간정토> 2024년 4월호에 수록된 백일출가 수행담입니다.

글_최하나(백일출가 46기)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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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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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명

기존 출가자들과는 결이 다르게 느껴지네요
몸도 건강하시길요! 🙏

2024-11-26 17:16:51

사공엽

좋은 법을 일찍 만나셨네요. 부럽습니다. 응원할께요. ^^

2024-11-26 16:51:44

이혜숙

따뜻하게 느껴지는 글 잘읽었습니다. 건강하십시요^^

2024-11-26 07: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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