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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4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의 첫 손녀, 첫 조카여서 친척 어른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반면에, 엄마는 동생들을 키우느라고 항상 바빴습니다. 엄마가 셋째, 넷째를 챙기고 있으면 저는 둘째랑 놀곤 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친구들에게 엄마랑 단둘이 여행 다녀온 얘기를 들으며 ‘아, 엄마와의 관계가 저럴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는 게 부러웠습니다.
아버지는 교육열이 높았습니다. 제가 네 살 때부터 매일 밤 저를 식탁 앞에 앉혀놓고 한글, 한자, 수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매일 퇴근 후 저를 가르치던 것은 아버지의 큰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아버지가 마냥 무서웠습니다. 일곱 살 때 초등수학 경시대회 문제집을 풀다가 실수한 적이 있었습니다. 숫자를 16이라고 써야 하는데 6을 0인지 6인지 애매하게 써서 틀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6을 0으로 쓴 걸 실수라고 생각하지 마라, 실수도 실력이다”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실수를 너그러이 받아주기보다는 따끔하게 혼을 내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학교에서 계속 전교 1등을 하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관계 면에서는 엄마와 아버지가 멀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인생에 정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대학에 다니는 것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아서 더 나은 삶을 찾아 귀농 생활을 해봤지만,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정답을 찾아서 헤매던 중에 귀농해 있던 마을의 이웃인 ‘앵두 이모’님이 정토불교대학을 권해주었습니다. 불교대학을 다니며 ‘이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연달아 졸업했고 전법활동가 교육을 받았습니다. 돕는이, 진행자, 모둠장 소임을 차례로 맡으며 단계를 밟아가다 보면 진리에 닿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지금 이대로 괜찮습니다’라는 기도문을 되뇌면서 절을 하는데, ‘나는 행복하다. 그러니까 더 바랄 게 없는 상태구나’라는 걸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꼭 발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도하면서 차츰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외로움을 느끼는 줄을 몰랐습니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본 적도 별로 없었습니다. 어릴 때는 대가족이다 보니 할머니나 동생이랑 방을 같이 쓰곤 했습니다. 대학 가서는 애인이나 동아리 사람들과 붙어 지냈습니다. 귀농해서 생활 공동체에 들어가서도 공동체 구성원들과 24시간 같이 생활했습니다. 서울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여동생과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다 2년 전 동생이 결혼하면서 혼자 살게 되었는데 그때 심리적으로 많이 무너졌습니다. 동생하고 살 때는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장도 보고 집안일도 부지런히 해놓곤 했는데, 혼자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동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렇게 행동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동생한테 좋은 언니, 잘하는 언니로 보이고 싶어서 애를 썼던 것입니다. 혼자라서 보여줄 사람이 없으니 막살았습니다. 밥도 안 챙겨 먹고, 밤에 불 끄기도 귀찮아서 불을 켜놓고 잤으며, 집안일들은 쌓여만 갔습니다. 외롭고 무기력해지다 보니 휴대전화로 유튜브 동영상이나 SNS만 봤습니다. 제가 기대하는 제 모습은 집안일도 잘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정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저는 친구를 초대하면 오기 직전에 집을 치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이 깨끗하니 친구에게는 제가 굉장히 단정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모순적인 삶을 살면서도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수행하면서는 좀 괜찮아졌습니다. 아침 기도를 미루지 않고 한 날은 그날 할 일도 미루지 않았습니다. 씻고 밥 먹고 전등 끄는 일도 미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침 기도를 미룬 날은 다른 것도 다 미루었습니다. 이걸 반복해서 경험하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담회에서 법사님께 좋고 싫음에 끌려가지 않는 연습을 위해 우리가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기도하는 거라는 법문을 들었습니다. ‘아, 그걸 연습하는 거였구나’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은 다른 것 같습니다. 지난 입재식 이후에도 절반 정도만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기도한 날은 덜 외롭게 느껴집니다. 있어야 할 게 없다고 생각할 때 외로웠는데, 감사함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내게 없는 것을 찾기보다 이미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소임을 많이 하는 이유도 외롭기 싫어서인 것도 있습니다. 진행자를 하려면 법문 듣고, 회의하고, 안내하고 수행 연습 올리는 등 계속할 일이 있어서 유튜브 볼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관리 감독하에 있을 때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혼자서 척척 하시는 분들을 보면 신기한 마음이 듭니다.
사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소임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진행자를 맡았을 때는 빚 갚는 마음이었습니다. 아무 보상도 없이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수업을 이끌어주신 분들께 보답하려면 나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돕는이와 진행자를 한 번씩 하고 나니 빚을 다 갚았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눔의 장’을 갔다 오면서 정토회 활동에 더 큰 애정이 생겼습니다. 나눔의 장에서 제가 엄마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 나 엄마랑 같이 밖에 나가서 단둘이 밥 먹고 싶어”라고 얘기를 하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엄마는 동생들 챙기느라 제게 무심한 줄만 알았는데 ‘엄마 나름대로 사랑을 주신 거고, 내 얘기도 듣고 계셨구나. 엄마랑 단둘이 뭘 하지 않아도 괜찮구나’ 하는 걸 알게 되면서 엄마의 사랑이 이미 충분했다는 걸 체험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릴 때 주말이면 온 가족이 등산을 갔습니다. 항상 동네 뒷산에 올라갔는데 매주 자연을 보면서 자연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고, 섬세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차이 말고도 시시때때로 자연이 다채롭게 변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몇 년을 가족과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냈던 만큼 자연은 가족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산에 골프장과 아파트가 들어서고 계곡은 물이 말라가고 나무가 베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스무 살까지 할머니랑 같이 살았던 것도 제가 환경에 관심을 두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할머니는 밥 한 톨도 남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쌀 한 톨에 농부의 땀방울이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물과 전기를 아끼셨고 옷도 기워주셨습니다. 할머니의 검소한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환경 실천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쓰레기 줍기’ 같은 봉사 활동을 많이 했고, 환경 관련 책이나 다큐멘터리도 찾아보았습니다. 이렇게 관심이 커지면서 나중에는 집착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이렇게 예쁘고 파란 하늘을 10년 뒤에도 볼 수 있을까?’ 싶고, 날씨가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이제 서너 살밖에 안 된 아기들은 어떡하지? 하며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또 SNS를 통해 사람들이 고기 먹고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가고 새 옷 사는 걸 보면서 화가 났습니다. ‘내가 아무리 채식하고 비행기 안 타고 중고로 옷을 산들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화풀이도 많이 했습니다. 애인과 카페에서 데이트할 때 “나랑 데이트하는데 텀블러를 안 들고 오는 게 말이 돼?” “내가 얼마나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일회용 컵에 커피를 받은 거야?”라고 따지며 울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은 “물티슈 써도 돼?”하고 물으며 제 눈치를 봤습니다. 저는 친구들이 눈치를 볼 게 아니라 환경 실천이 중요하다는 제 생각에 동의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엄청나게 커지고 심각해지는 와중에 ‘깨달음의 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다녀오고 나서야 지구를 지킨다는 게 오만한 생각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기껏해야 100년 살다 갈 생명이고 지구라는 별은 사람들이 다 사라진다 해도 어떻게든 존재할 텐데 ‘내가 이 행성을 지켜야 한다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구나.’ 돌이키니 마음이 후련해졌습니다.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고 나서야 문제가 생겼을 때 비난하거나 괴로워하느라 에너지를 쓰기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에너지를 쓰라는 법륜스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한테 불교대학을 알려주신 ‘앵두 이모’는 정말 다정하고 인자한 분입니다. 이모가 종종 저를 ‘스님의 하루’에서 봤다며 “지향 씨, 여기 나왔네요”라며 연락을 주곤 합니다. 저도 앵두 이모처럼 어떤 어려움도 털어놓을 수 있는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능력 있고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 사람을 챙기고 잘 웃으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하고 다정한 사람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일 잘하는 사람은 멋있기는 하지만 어렵게 느껴지는데, 사소한 것들을 기억해 주고 챙겨주는 도반을 볼 때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저는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때 활동하는 맛이 납니다. 앞으로도 계속 소임을 맡아 수행하고 봉사하면서 따뜻하고 다정한 수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글_유지향(청년특별지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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