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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서른을 맞이하고 직장인 백일출가 프로그램 ‘청년붓다’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백일간의 법당 살이도 재미있었고 도반들과 함께 사는 것도 좋았습니다. 백일 회향 후 집으로 복귀했다가 한 달 후 부모님께 독립을 선언하고, 도반들과 서초법당 근처에 빌라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6명이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4시 30분에 기상하여 예불 준비 및 천일결사 기도를 했고, 일주일 단위로 공양 준비, 화장실 청소, 거실 및 바닥 청소, 빨래 등의 소임을 나눠 생활했습니다.
집을 나오기 전에는 집안일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모두 부모님이 해주셨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생활에서는 못해도 해내야 했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청소, 빨래, 요리 등을 처음으로 직접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모르면 도반들에게 물어보고 배우며 하나씩 익혔습니다. 삶에 진짜 필요한 것들을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공동체 생활로 인해 저는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습니다. 첫째, 자립할 수 있는 힘, 생활 능력이 생겼습니다. 밥, 청소, 빨래 등 삶의 기본이자 필수적인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자립에 필요한 생활 능력이 딱 잡히니 부모의 그늘을 떠나 어디 가서든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둘째, 개인주의적 성향에서 공동체 중심의 성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먹거리나 챙길 것이 있으면 저만 생각했는데, 항상 함께 먹고 함께 해야 하다보니 타인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많이 생겼습니다. 안 맞는 부분은 맞춰가고 조정하면서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생활 면에서는 규칙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안 지켜지면 이 생활은 무너지고 서로에게 분별심과 미움, 원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유 불문하고 생활의 규칙은 지켜나가야 했습니다. 누구 한 명이 희생해서도 안 되고, 각자 맡은 소임을 반드시 해내면서 책임감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셋째, 저에게 가장 좋았던 것은 부모님의 간섭 없이 정토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생활할 때 정토회 활동을 하고 돌아오면 부모님의 잔소리와 간섭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독립해서 법당 근처에 사니 시간적 여유도 많았고, 부모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눈치 안 보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참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것을 집을 나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부모님 집에 내려가서 칼국수를 해드렸습니다. 그때 제가 요리하는 것을 처음 본 엄마가 “얘가 요리를 하네?’하면서 놀라셨습니다. 엄마는 ‘애가 밖에 나가서 그래도 사람 구실은 하고 있구나’ 싶어 나름 대견하게 보셨던 것 같습니다. 이후로 부모님은 제 독립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덕분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배웠던 많은 것들이 남편과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공동체 생활로 인해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0대 중반까지 저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잘 몰랐습니다. 답을 찾지 못해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이나 생각에 많이 휩쓸리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정토회를 만났고, 이후 불교대학에서 스님 법문을 들으며 참 재밌었습니다. 자아 탐구를 좋아해서 한때 심리 상담을 공부했던 저는 부처님 법을 공부하고 도반들과 대화 나누는 것이 좋았습니다. 어떤 평가나 이해관계가 없는 소속감도 너무 좋았습니다. 회사에서는 이런저런 일로 늘 평가를 받아야 했고, 그럴 때마다 스스로 위로하고 다독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토회 안에서는 아주 작은 일에도 ‘잘한다’며 격려해주고 칭찬해주니 자존감이 많이 올라가고 활동하는 데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특히 일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정토회는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해서 좋았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해나가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고 거리낌 없이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깨달음의 장, 명상수련, 동북아역사기행, 인도성지순례 등 정토회의 많은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청년대학생정토회의 기획 홍보팀에서 활동하면서 『월간 아난다』라는 소식지도 만들었습니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경험하고 배우는 것이 참 재미있고 유익했습니다. 또한 더디지만, ‘내가 이런 상황에는 이런 마음이 드는구나’, ‘내가 이런 업식이 있구나’하며 저를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셨습니다. 어르신들 때문에 여자는 집에서 편하게 옷을 입으면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잠을 잘 때도 속옷은 늘 입어야 하고 항상 몸가짐과 옷차림을 바르게 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경직되고 유교적인 환경에서 맏딸로서 지녀야 하는 예의, 예절, 행동 같은 것들을 은연중에 많이 배웠던 것 같습니다.
중학생 때 부모님의 갈등이 심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아빠와 싸우시고는 제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엄마랑 아빠 이혼하면 누구 따라갈래?” 그러나 저는 그 누구도 따라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엄마 아빠 이혼하면, 학교 그만두고 돈 벌어야지”하며 처음으로 독립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20대 때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심리적으로 기댈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부족하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사진학과로 진학하고 싶어하는 저를 위해서 사진학원에 보내주셨고,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어하는 여동생은 예술 고등학교를 보내주셨습니다. 하지만 응원이나 사랑, 무조건적인 지지 등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에게 별로 고마운 것도 없었고, ‘나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지’라는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정토회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어렸을 때 부모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 위로, 응원을 못 들었던 것이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늘 괴로움의 원인으로 따라다녔습니다. ‘엄마가 나에게 사과해야 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따뜻하게 보듬어주지 않았다는 원망이 컸습니다.
부모님을 이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9박 10일 명상 때였습니다. 묵언 시간에 간식으로 나온 감자를 껍질째 먹었는데 속이 쓰렸습니다. 다른 도반들은 껍질을 다까서 먹었습니다. 묵언이 풀리자 “갑자기 배가 아픈데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니, 한 도반이 감자껍질과 감자 싹에 독성이 있다고 해서 배가 아픈 원인을 알았습니다. 그때 불현듯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엄마는 27살에 나를 낳았는데, 30살이 넘은 저는 이제야 감자껍질과 감자 싹을 먹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27살밖에 안 된 어린 여자가 애를 낳아서 어떻게 사랑을 주고 보듬어주었겠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도 뭘 몰랐구나’ 하고 엄마를 처음으로 이해했습니다.
또 솔숲 바위 위에서 명상을 하고 눈을 딱 떴는데, 그 앞에 바위가 마치 엄마 같았습니다. 엄마는 늘 냉정하고 따뜻한 말을 잘 못했습니다. 바위처럼 제가 아무리 뭐라 해도 꼼짝도 하지 않는, 바뀌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엄마한테 바뀌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이 변해야 했습니다. 엄마를 이해하게 되면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코로나로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전환될 즈음 할머니에게 치매가 왔습니다. 아빠는 지방에 근무해서 주말에만 올라왔고, 삼남매는 모두 독립했기 때문에 평일에는 엄마와 할머니 두 분만 있었습니다. 평일은 노인케어센터에서 일정시간 할머니를 봐줬지만, 주말에는 봐줄 사람이 없어 어찌어찌 제가 주말마다 본가에 가서 할머니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밥때 되면 밥 챙겨드리고 아무 곳이나 가시지 않도록 지켜보며 2년간 할머니를 돌보았습니다. 이것이 엄마에게는 큰 힘이 되었나 봅니다.
정토회 봉사만 한다고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었는데, 이때 가족에게 봉사를 한 것입니다. 그때 엄마와 사이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엄마는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정토회에서 한 활동들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정토회 덕분에 삶도 바뀌고 가족도 챙기고 엄마와의 사이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삶의 가장 큰 과제였던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상처가 정토회 활동을 통해 많이 녹아 내렸습니다. 이제는 부모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남편과 경주에 내려와 살고 있는데, 훨씬 여유롭고 편안합니다. 사람들을 덜 만나니 확실히 여러 가지 면에서 덜 끄달립니다. 아는 사람도 없어 정토회가 유일한 인맥입니다. 결혼하면서 정토회는 제 삶의 한 축이라는 것이 더 확고해졌습니다. 지금은 큰 욕심 없이 직장과 정토회 일을 병행하며 꾸준히 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현재는 서원행자 교육후보생으로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수료하면 지회장 소임을 맡아줄 수 있느냐고 법사님이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기꺼이 “예”하고 마음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정토회에서 어떤 소임을 주든 기꺼이 할 마음입니다. 남편과 함께 정토회 활동을 하고 있어 눈치 볼 일이 덜합니다. 가끔 남편이 정토회 일이 너무 많다며 서운하다는 말을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저를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남편이 고맙습니다.
가정과 정토회와 직장은 제 삶의 한 축이자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저의 이런 활동들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뿌듯하고 보람된 삶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제 성장에 많은 도움을 준 정토회에 보답하고픈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앞으로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글_박세미(청년특별지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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