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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회는 2005년에 고물상을 같이 하던 작은 언니가 정토불교대학에 다니면서 알았습니다. 고물상으로 돈 버느라 바쁠 때라 정토회에 다니라는 말은 못 하고 JTS 후원을 권유했습니다. 당시 언니는 불교대학 졸업은 못 했지만, 법륜스님 테이프를 사서 공부했고, 저도 곁에서 들으며 일상에 접목하며 지냈습니다.
그 후, 잘 되는 것 같던 서울 생활에 문제가 생겨 큰 빚을 지고 광주로 내려와 다시 고물상을 시작했습니다. 건물주인과 가게 계약 건으로 법적 다툼까지 생겼던 최근 10년, 죽어라, 일만 했습니다. 빚을 거의 다 갚자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은 간절함에 광산법당을 찾았습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진행자를 맡았습니다. JTS 실천 활동 담당, 복지 꼭지 등 다양한 소임도 소화했습니다. 현재는 모둠장으로 모둠원들이 서로 잘 소통하고, 다 같이 활동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고물상을 시작한 제 나이는 32세로, 젊을 때였습니다. 돈이 되는 직종이라 시작했지만, 썼던 물건을 재활용하는 일은 긍지도 안겨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뭔 젊은 여자가 고물상을 한다고.” 하거나, “무슨 문제가 있다.”라며 시선이 곱지 않았습니다. 거래처 남자 사장들은 저를 못 본 척 뭉개기도 했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더욱 강하게 나갔습니다. 원리원칙을 중요시하고 고지식할 정도로 옳다고 생각하면 밀어붙였습니다. 그냥 먼저 부딪혔습니다. 만만치 않은 벽을 넘어서기 위해 고물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연구했습니다. 제가 어리고 젊은 여자지만 쉽게 보지 말라는 깡다구를 보였습니다.
장사는 신용 있게 했습니다. 물건을 팔거나 살 때 깔끔한 거래로 신뢰를 주고자 했습니다. ‘대영자원 여정화’에게 고물을 넘기면 절대 손해 안 본다는 기준을 딱 세우고, 원칙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고물을 살 때도 마찬가지로 정당한 이윤을 남긴다는 취지로 물건이 좋으면 돈을 더 얹어주고 샀습니다. 물건이 안 좋으면 덜 주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쌓았습니다. 돈에 대해선 철저했습니다. ‘남의 돈은 내 돈이 아니다’라는 원칙으로 남에게 줄 돈은 제가 어렵더라도 먼저 주는 방식을 지켰습니다.
처음에는 잘 되던 사업이 시간이 갈수록 어렵고 고된 상황이 거듭되었습니다. 영업을 맡아 의지가 되어줄 것 같았던 동료는 본인 명의는 물론 제 명의로도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들여 사업을 키웠습니다. 부채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빚으로 인한 다툼이 계속되고 서로 죽이려고 하는 상황까지 치달았습니다. ‘나 혼자 죽으면 다 끝나지’ 하는 데에 사로잡혀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서울 생활을 정리했습니다. 어깨에는 무겁게 빚을 지고, 트럭에는 짐을 가득 싣고 내려오면서 ‘여기서 핸들 한 번 돌리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텐데’라는 위험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파산 신고를 하고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랬습니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낳아주신 덕분에 ‘무엇이 되었든 밑바닥까지 가봤으니 뭔들 못하겠나. 인생? 그냥 빚 갚고 살지 뭐.’라고 마음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내가 없다’ 여기고 10년을 살았더니 빚도 갚고 제로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날, ‘내가 그랬지’ 인정하면서도 제 무지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워 휘청거렸습니다. 고물상이 망한 것이 다 내 잘못이라고 받아들이자니 원망과 억울함에 괴로웠습니다. 지난 10년을 허비했다 싶으니 한스러웠고 ‘그렇게밖에 못 했냐’라는 자책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정토회를 다시 만나 꾸준히 수행하고 봉사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여정화, 너 이만큼 잘해 왔어.’라며 자신을 자주 격려합니다. 잘 버텨준 제가 고맙습니다.
제가 잘한 일 중 하나는 직접 농사지은 배를 정토회에 보시한 일입니다. 나주의 명물인 배를 정토행자들에게 맛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고물상 사업은 실상 돈을 벌기도 하지만 힘들고 고단했습니다. 저는 고물상을 정리하며 더럭 겁이 났습니다.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먹고살지, 도시에서 다시 직장을 잡을지, 시골 생활을 할지 선택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고민하다가 일단 저질렀습니다. 불도저 스타일을 살려 나중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부딪혔습니다.
그렇게 나주에서 배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동업으로 했다가 지금은 독립해 혼자 꾸려가고 있습니다. 배 농사도 고물상처럼 여자가 혼자 어떻게 하냐는 부정적인 시선이 있고, 힘도 들지만 재미있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수확한 배를 먹고 “와! 맛있다”라는 반응을 들을 때가 정말 좋습니다. “여정화 배를 먹어보니 다른 배는 못 먹겠더라.”, “아니 배에다가 설탕을 쳤나!” 이런 말을 들을 때 제일 보람찹니다.
어느덧 배 농사를 시작한 지 2년이 되어갑니다. 수출도 하고, 판매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매년 정토회에 배 보시도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배를 보시하는지 도반이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과수원을 했는데 그때 먹었던 배 맛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해요. 도시에서는 그 맛을 느껴보지 못했거든요. 제가 농사지은 배에서 그 추억의 맛이 살아나서 도반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배 맛은 이런 거다.”라고요.
과수원에 70년 이상 오래된 배나무에선 모양이 예쁜 배보다 삐뚤어진 배가 더 많이 열립니다. 모양은 예쁘지 않아도 맛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은 배 맛의 비결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절반은 성공했습니다. “지금까지 먹어본 배와는 차원이 다르구나!” 제 배를 맛보시면 여러분이 알고 있던 배 맛의 기준이 곧 바뀔 것입니다.
광산법당에서 불교대학에 입학했던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제 얼굴을 본 도반이 저한테 말 건네기 어렵고 무섭다 했습니다. 마치 제 주변에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진 것처럼, 웃음기가 없고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정일사1기간 저의 수행문은 ‘이제 방긋 웃겠습니다. 말도 부드럽게 하겠습니다.’였습니다. “웃으면 귀여운데 왜 안 웃냐?”라는 소리도 듣고 “별명이 얼음공주다. 너무 차갑다”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나도 속은 따뜻하고 여린데 왜 꼭 강한 이미지로만 보이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주로 남자들과 어른을 상대하다 보니 약한 모습을 안 보이려고 했습니다. 말을 줄이고 굳은 표정을 짓던 직업적인 면이 제 몸에 습으로 남았음을 알았습니다. 수행을 계속하다 보니 웃지 않을 건 또 뭔가,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웃습니다. 한번은 부처님 오신 날 광산법당에 올림머리에 한복을 입고 갔더니 난리가 난 적도 있습니다. 요즘은 많이 밝아졌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저는 남의 인생에 관여하기 싫고 간섭받기도 싫은 사람이었습니다. 불교대학에 다니면서도 실천과제였던 JTS 거리 홍보를 한 번도 안 갔습니다. 깨달음의 장2을 다녀오고 인도성지순례를 경험하며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인도에 다녀온 후 저는 정말 복된 사람이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임이 주어졌을 때 바쁜 와중이었지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경전대학에 다니면서는 JTS 거리 홍보에 적극, 동참했습니다. 복지 꼭지를 매달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전에는 핸드폰으로 게임 하며 돈을 많이 썼는데 어느 순간, 딱 끊었습니다. 그 돈으로 JTS에 후원하고 금액도 늘리고 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고 고마웠습니다.
엊그제 행복학교를 홍보할 때가 떠오릅니다. 모둠장인 덕분에 빼는 마음 없이 먼저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아무도 없으면 나 혼자라도 하지’라고 가볍게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회원들이 몇 명 안되니 ‘다 취소하고 좀 쉴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미리 나온 도반이 있어 나오길 잘했다는 마음으로 다시 바뀌었습니다.
저는 노력하는 만큼 이룬 경험을 하고 나니 어떤 일이든 두려움이 없습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고물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며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도 했지만, 세상을 보는 제 시선은 여전히 긍정입니다.
일하며 호되게 몸을 쓰다 보니 헛된 망상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이젠 나이 들어 몸도 쉬이 뻐근하고 빨리 풀리지도 않지만,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돈의 여유는 없지만 쉬엄쉬엄해도 마음이 편안합니다.
소임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오고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살핍니다. 힘든 도반들의 상황도 이해가 되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분별심이 가벼워짐을 느낍니다. 그렇게 점점 발전하는 '나 자신'을 만납니다.
야무지고 단단하며 떨림 없는 목소리, 여정화 님은 감기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건강합니다. 인생에서도 주도적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씌워진 강한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제 눈엔 콩깍지가 씌운 듯 멋있습니다. 과묵한 여장군이 “예” 하고 방긋 웃는 여장부로 변신 중인 모습은 이뻤습니다. 실천 활동에서 자주 보던 도반이라 속사정이 궁금했는데 이야기 나눌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글_여수연 희망리포터(광주전라지부 서광주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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