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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편은 20년 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위암 선고를 받은 지 불과 6개월 만이었습니다. 저는 8살, 4살 아이들의 엄마였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풍파를 헤쳐나가기에는 너무 여렸습니다. 오직 남편만을 의지하고 살았기에 남편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둘째 아이를 낳고 생긴 산후통과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지’, ‘왜 하필이면 나야?’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 살아온 날들에 대한 후회와 자책이 일어났습니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불행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통에 짓눌려 살던 어느 날, 두 아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잘못되면 저 아이들도 잘못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마침 지인이 정토회 <깨달음의 장1>에 다녀올 것을 권유했습니다. 돌파구를 찾던 저는 주저 없이 깨달음의 장을 찾아갔습니다. 4박 5일 동안 머리가 아플 정도로 내내 울기만 했습니다. 정토회의 문턱에 들어섰지만, 초반에는 깨달음의 기쁨보다 지난날을 어리석게 보냈다는 후회가 마음을 떠나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거제의 대우조선소에 다녔습니다. 그 안에서 ‘대우불교청년회’를 만들어 회원들을 가르치고 이끌던 지도 법사였습니다. 저는 외부 회원으로 법당에 다니면서 남편을 스승으로만 알고 지내다, 인연이 되어 결혼에 이르렀습니다.
남편은 집에서도 개인 법당을 차려놓고 새벽 5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하고, 6시 반이면 출근했습니다. 가끔은 집안에서 만 배 정진을 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그때의 저는 무늬만 불자여서, 남편이 무더운 여름철에 땀을 뻘뻘 흘리며 정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집안에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면 되지. 나는 그저 아이들 잘 키우고 내 할 일만 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정토회원이 되고도 한참 시간이 흐르고서야, 남편이 제가 지향하는 수행자였음을 알았습니다. 탁월한 수행자들을 만날 때마다, ‘아! 저 모습은 남편의 바로 그 모습인데’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제게 남기고 간 유산은 재물이나 다른 무엇이 아닌, ‘바른 수행자로 살라’는 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삼 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바로 위 오빠와는 무려 11살 차이였습니다. 부모님과 언니, 오빠가 제 응석을 모두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그 습관은 업식으로 자리 잡아, 법당에서 다른 도반들과 어울릴 때 고개를 들었습니다.
"보살님은 꼭 보살님 생각대로만 하더라."라는 말을 대놓고 들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몰랐습니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매일 매일 돌이키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그 업식이 제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소임을 맡다 보니 자연스럽게 숙이는 연습이 되었습니다. 계속 ‘내가 난데’라고 뻣뻣하게 굴었다면, 어려운 일을 나누려는 사람은 물론, 아예 제 곁에 남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누가 ‘소임이 복이다’라고 말하면,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저러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소임이 저를 바꾸고 살렸으며, 제가 편해질 수 있도록 도와준 큰 은인과도 같았습니다. 이제는 소임을 하면서 제가 정토회에 진 빚을 조금씩 갚는 마음입니다.
법회를 하면서 도반들의 나누기를 듣다 보면 ‘아주 뛰어난 도반’들이 종종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아, 저런 도반들이 소임을 맡아서 책임자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맡는 건 아닌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순간 자신감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도반들은 비록 나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이 소임을 맡아 할 마음을 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부족하지만 해보겠다는 마음을 내고 있질 않은가?’라고 생각하며 답을 찾았습니다. 이후로는 어떤 소임이 주어지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일단 한다.’라는 마음을 냈습니다. 작은 모습 그대로 밭에 떨어져 보는 것입니다.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나누기가 부담스러웠습니다. 나누기 때문에, 수련장에 가기 싫을 정도였습니다. 인생 살아온 이야기나 가족에 대한 나누기가 나오면 마음이 거기에 딱 걸려서 아주 힘들었습니다. ‘왜 저런 걸 자꾸 내어놓으라고 하지’, ‘가족관계 이야기를 여기서 또 해야 하나’ 스스로 시비하는 마음으로 불편했습니다.
<나눔의 장2>에 갔을 때입니다. 나누기를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거듭거듭 해보니 어느새 나누기가 자연스러워지고 마음의 짐도 가벼워졌습니다. 아니 어느 날엔가는, 무겁게 지니던 마음의 짐을 완전히 털어버린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눔의 장에서 '도반이 스승'이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거 <깨달음의 장>에 가서는 울기만 하고 왔는데, <나눔의 장>에 와서야 비로소 나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변 도반들에게 ‘나눔의 장 효과는 깨달음의 장 곱하기 10’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적극 권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가벼워진 것은, 그동안 자상한 가르침으로 저를 인도해 준 '수련장의 법사님'들 덕분입니다. 항상 고마운 마음입니다.
2019년, 스님을 따라 동북아 역사기행을 떠났습니다. 그때 저희 일행을 태운 버스가 앞차를 추월하려다 추돌했습니다. 큰 부상자는 없었지만, 이 사고로 중국 공안이 출동했고, 사고 조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여정을 중단하고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사가 끝난 뒤 숙소에 돌아와 보니, 밤 11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자지 않고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봉사자들은 오늘 일정 마치느라 피곤하고, 내일의 일정도 있으니 일찍 들어가서 쉬어라.” 하고는, 정작 인솔 책임자로서 가장 피곤했을 스님은 홀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스님은 저희가 저녁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곁에 있었습니다. 고생했다고 한 사람 한 사람 토닥여 가면서 격려도 해주었습니다. “이 사고 덕분에 나도 오늘 저녁은 법문도 안 하고 쉬었다.”라며 농담했습니다.
저는 고된 일정으로 너무 힘들었지만, 스님이 사람 챙기는 모습을 보며 힘들다는 생각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람을 챙기는 게 대승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일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은 시아버지를 챙길 때 항상 아버지가 맛보지 못했을 만한 수입 과일을 찾곤 했습니다. 명절이면 새 지폐를 찾아다 지갑에 넣어주었습니다. ‘사람을 챙기는 것, 보살피는 것’ 그것이 수행이었습니다.
동북아 역사 기행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연이어 대전 법당에서 회의가 있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유수 스님에게 “잘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더니, “해탈했능교?”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바로 대답했습니다. “네, 해탈했습니다 스님.”
남편에게서 본 것과 스님에게서 본 것이 같습니다. 남편은 저와 딱 십 년을 살다 떠났습니다. 아직도 살아 있다면 삼십 년째 부부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삼십 년보다 더한 사랑을 남편에게 이미 받았습니다. 아이들에게도 남편이 남긴 불법의 씨앗이 심겨 있으리라 믿습니다.
만약 지금 방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남편이 만 배 정진을 하고 있다면, “아니 왜 당신 혼자서 해요. 말하지. 그럼 나도 같이 할 건데. 서운하네!”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저와 지금의 제가 달라진 모습입니다. 지금의 저는 편안합니다. 비록 집착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수행력'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다.’라는 욕심도 없습니다. 따로 갈 데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주어지는 대로, 놓이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함께 한 도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다들 ‘신심, 신심’ 하는데 신심이 무엇입니까?” 정형련 님이 답했습니다. "신심은 진리를 믿는 마음인 것 같아요. 인간으로서 부처님이 통찰한 그 진리를 믿고 따르는 마음. 스님도 그런 ‘인간 붓다’를 따라가고 계신 거겠죠. 그러면 지금 우리가 스님을 따라가고 있는 것도 신심이 되겠죠.” 남편의 유산을 품에 안고 스님의 뒤를 따르는 정형련 님의 신심이 느껴졌습니다. 아직은 따라가길 머뭇거리는 작고 초라한 제 신심이 부끄러웠습니다.
글_배병갑 희망리포터(경남지부 거제지회)
편집_이승준(광주전라지부 전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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