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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며 딸 넷을 키우는 어머니가 늘 안쓰러웠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막내딸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직장도 다니고 돈도 남들만큼 버는 가장이었지만, 외도가 잦고 주사가 심했습니다. 술 마시고 들어온 날은 식구들에게 다 나가라고 소리치며 한겨울 집 유리창을 뜯어냈고, 그 바람에 우리 가족은 외갓집으로 쫒겨나기 일쑤였습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쫒겨다니며 너무 힘들었지만, 어머니가 꿋꿋이 중심을 잡아준 덕분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불교 신자였습니다. 어머니는 새벽 4시 30분이 되면 청수를 올리고 향과 촛불을 켜고 절을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저도 어긋남 없이 바른길을 잘 따라왔습니다. 반면 가장 역할을 제대로 못 했던 아버지에게 분별심이 컸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늘 부끄럽고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조카 돌잔치에서 아버지는 과음으로 딸과 사위들 앞에서 주사를 부렸습니다. 얼마 후 어머니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억울함과 답답함을 호소하다 뇌경색으로 쓰러졌습니다. 8시간 동안 의식을 잃은 채 헤매다 겨우 깨어났습니다. 이를 지켜본 딸과 사위들은 더는 어머니를 이렇게 두면 안 되겠다 여겨 합심하여 부모님의 이혼을 진행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줄 수 없다며 선을 그었고, 그렇게 부모님은 40여 년을 살고 헤어졌습니다.
어머니는 그 후로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2020년 72세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떠나기 직전, "몸은 아프지만, 너희 네 자매 모두 엄마를 위해 최선을 다한 걸 알아. 그래서 아파도 행복하고 감사해."라고 말했습니다. 췌장암의 극심한 고통 끝에 세상을 떠나는 어머니를 보며 안타까웠지만, 딸들로서는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아버지와 연락을 끊었지만, 수행 덕분에 숙제를 풀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생각과 아버지가 수치스럽다는 생각, 모두 제 마음이었고 제 욕심이었습니다. 비록 훌륭한 가장은 아니었지만, 저를 낳아주고 대학 보내고 스스로 앞가림하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버지로서 역할은 다한 것이라 알고 나니 원망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결혼 후 남편과 갈등이 심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너무 공허하고 삶이 가치없게 느껴져, '이러다가 중년 남녀가 외도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아버지가 분란을 일으켰던 40대 중반이었습니다. 아버지도 외롭고 인생에 의미가 없었다는 걸 알게 되니,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있는 걸 보고 일으켰던 극심한 원망도 서서히 옅어졌습니다. 언젠가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낳아주고 키워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선배 도반이 된 동네 언니를 통해 정토회를 알았습니다. 정토회에 다니던 언니가 백중기도 회향에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조계종 불교 신자였기에 별 거부감 없이 강동법당에 따라갔습니다. 그렇게 정토회를 알았지만, 다니던 절이 있어 그 후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2019년 스스로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면서 정토회와의 인연이 깊어졌습니다.
2018년 12월, 심한 우울증으로 3개월 정도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지냈습니다. 당시 남편이 제가 가정주부로 경제 능력이 없음을 언급했고, 그게 저를 무시하는 것 같아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우울해서 ‘사람이 이러다 자살하는구나’ 싶었고 무서웠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용기를 내어 불교대학에 입학했고, 이어 <깨달음의 장>에 갔습니다. 신세계였습니다. 힘들던 마음이 그토록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환희심 속에서 불교대학에 다녔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의 기쁨도 잠시, 2021년 불교대학 진행을 맡아 봉사하던 중 시댁 그리고 남편과 갈등을 크게 겪으면서 다시 우울증이 왔습니다. 남편은 3형제 중 둘째입니다. 시아버지는 이른 나이에 가장이 되어 당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들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물려주지 않고자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 만큼 기대도 커서 때로는 아들들을 자기 뜻대로 하려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시아버지의 책임감 있는 모습이 저의 아버지와 달라 좋았습니다. 저도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성격이라 노력을 많이 했고, 시아버지도 저를 아껴주어 관계가 좋았습니다.
어느 날, 효자였던 시아주버니가 더는 장남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남편이 장남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지에게 남편과 형제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제 생각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시아버지는 극도로 화가 나서 ‘너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마라. 오지 마라.’ 하며 저를 내쳤습니다. 그런 중에 남편은 시아버지 편을 들면서 저를 없는 사람 취급했습니다.
거의 1년 반 정도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한때는 동네 산책할 때도 손을 꼭 잡고 다녀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던 돈독한 부부였습니다. 너무나 달라진 남편의 모습에 ‘나를 무시해?’라는 마음이 들어 저도 쌀쌀맞게 대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가 아플 때조차 살피지 않는 남편에게 심한 배신감이 들어 같이 무시했습니다. 당시 불교대학 진행자를 맡고 있었는데, 수행적 관점을 놓치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하려니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도 '소임은 수행과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 꼭 쥐고 있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기에 매일 새벽기도도 놓지 않았습니다.
2022년 겨울 즈음, 차가웠던 마음이 전환되는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책을 한 쪽 씩 읽는 습관이 있는데,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오직 내 마음뿐이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습니다. 내 몸도 어찌할 수 없고 내 가족도 어찌할 수 없지만 내 마음은 내가 바꿀 수 있다...... 많이 들어 다 알고 있다고 착각했음을 깨닫자 제 어리석음이 확 다가왔습니다.
제가 간절하게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괴로웠던 건 남편에게 바라기만 해서였습니다. '남편이 나를 인정해 주고 내 편에 서기를, 남편이 바뀌기만을 목매어 바라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구나!' 그제야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2019년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면서 시작한 기도였습니다. 3년을 기도하면 변화가 있다고 들었는데, 저는 계속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2021년 상반기 <정일사>에서 제가 제 목줄을 남에게 쥐여준 채 괴로워한다는 도움 말씀을 들었을 때도 그 줄을 완전히 놓지 못했습니다.
수행한다는 저도 제 마음 하나 바꾸지 못하는데, 남편이 바뀌기를 바라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기대를 내려놓아야 편안하고 자유로워짐을 깨닫게 되자, 남편이 더는 밉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자신을 고생하며 키운 아버지에게 가진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곧바로 남편에게 숙이지는 못했지만, 찬 바람 쌩쌩 불던 제 마음이 녹는 게 느껴졌습니다. 쏘아붙이는 말을 멈추고, 가끔 한마디씩 말도 건넸습니다. 대화할 때는 제 마음이 어떤지 나누기하듯 차분히 알렸습니다. 기도하며 올라왔던 제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사과하니, 처음엔 듣고만 있던 남편도 서서히 굳었던 마음을 풀어갔습니다. 이제는 다시 전처럼 편안한 관계로 돌아왔습니다. 지금이니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분별심과 시비심이 큽니다. 술 마시고 언성이 높아지는 사람을 보면 여전히 불편하고, 누가 길에 함부로 쓰레기 버리는 걸 봐도 화가 납니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커서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남편에게 그리고 시아버지에게도 바랐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제 힘든 삶을 강조하면서 "너희들은 대체 뭐가 부족해서 공부를 안 하니?"라고 묻곤 합니다. 저와 아이들이 사는 환경은 다른데, 부지런하지 못하다거나 열심히 안 한다고 잔소리 합니다. 물론 아이들에게 "엄마가 꼰대라서 미안해."라고 사과하기도 합니다. 그게 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 그런 것 같습니다. <정토행자의 하루> 인터뷰 요청에도 ‘내가 무슨 인터뷰야?’싶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았고,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해도 될 텐데, 여전히 저는 잘 안되고 부족한 사람 같습니다.
저는 제 행복과 가족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인간관계도 좁았습니다. 제 삶의 괴로움도 해결 못 하고 살았으니 주변에는 관심도 없고 연기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정토회는 그런 저에게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 안목이 넓어졌고, 누군가 우리 집 배경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던 마음도 없어져서, 이제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곧잘 이야기합니다. 지난날을 수치스러운 과거가 아니라 잘 극복해낸 경험으로 생각하는 저를 봅니다.
전에는 남편을 부러워했습니다. 남편은 돈도 벌고 인정도 받는데 저는 경제력 없이 전업주부로 있으니 움츠러들었습니다. 저는 결혼 전 이름만 말하면 모두 알만한 화장품 회사에서 근무했고, 주말도 없이 야근하면서 새벽 한두 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어 7년을 일하고 그만두었습니다. 남편을 볼 때마다 그때 내가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 꽤 괜찮은 지위에 있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곤 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기는 일로 내 성공을 삼으려고 했으니 왜 그랬을까 싶습니다. 지금 정토회에서 하는 일은 세상에 큰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제가 특별한 도움은 안 되더라도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뿌듯합니다. 또 모범을 보여주고 이끌어 주는 도반들이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백 번 넘어지면 백 한 번 일어나라.' 는 저를 두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 벌써 20번, 30번도 더 넘어진 것 같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가보려 합니다. 때로는 파도와 흔들림이 있겠지만 늘 중심으로 돌아오는, 호수같이 평온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즐거웠던 인터뷰 끝에 나은혜 님의 전법담도 슬쩍 물어보았습니다. 어려움을 호소하던 지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법륜스님 말씀과 웹자보 등을 꾸준히 보냈는데, 어느 날 그분이 번창하던 사업을 그만두고 불교대학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기대 없는 진심이 통한 이야기는 감동이었고, 나은혜 님의 진솔함과 성실함도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함께 하는 도반들이 참 소중하다는 말이 가슴에 따뜻하게 남아있습니다. 곳곳에 스승이 있으니, 소임이 복입니다.
글_이정원 희망리포터(경기인천서부지부 광명지회)
편집_이혜수(서울제주지부 성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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