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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저는 어릴 때부터 언니 오빠 그리고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트럭 운전을 하던 아버지는 부족한 것 없이 저를 채워 주었습니다. 어디에 갈 일이 있으면 겨울에는 히터를, 여름에는 에어컨을 차에 미리 켜놓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는 대한민국 1프로 안에 드는 아버지라고 말씀할 정도로 자상했습니다. 어린 시절 화목한 집안 분위기 덕분에 늘 웃고 다니는 저를 초등학교 선생님은 호호양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족으로부터 애정과 보살핌을 받는 게 당연했던 저에게 시댁의 경직된 분위기는 어색하고 불편했습니다. 시어머니는 꼼꼼한 성격에 성실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시할머니를 평생 모시고 산 스트레스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름대로 며느리들에게 잘해주려고 했지만 저는 친정과 너무 다른 시댁에 가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남편은 굉장히 덜렁대는 저와는 다르게 꼼꼼하고 성실한 성격이었습니다. 제가 집 안 청소를 안 해놓으면 남편이 도와주었는데 그럴 때면 남편의 안색을 살피며 눈치를 봤습니다. 부모님이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인지 남편과 분란이 생길까 봐 겁이 나고 불안했습니다.
남편이 큰 소리를 내거나 회사 일 때문에 기분이 나쁘면 제가 괜히 주눅 들고 위축됐습니다. 그래도 아들의 방긋방긋 웃는 모습을 보면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은 사라졌습니다. 내성적인 저와는 달리 아들은 활달한 성격으로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습니다. 학교를 마치면 집에 바로 안 오고 항상 바쁜데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아들에게 공부하라고 안 했기 때문에 갈등도 전혀 없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각자의 생활에 바쁠 때 저는 주변 사람들이 화상을 입었냐고 물을 정도로 아토피가 심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아토피 후유증으로 41살에 백내장 수술까지 했습니다. 큰 수술이 아니었는데도 ‘젊은 나이에 내가 왜 이런 수술을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올라와 슬펐습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몇 달을 미루는 동안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그때부터 악순환이 시작됐습니다.
수술이 끝나면 아토피가 심해지고 그래서 약을 먹으면 간염 수치가 많이 올라가서 병원에 두 번이나 입원했습니다. 남들이 아토피에 좋다고 말해주는 것들도 몸에 무리가 가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저를 보면 “내 얼굴이 더 이상하냐?”라고 물어보니 남편은 저를 잘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너무 힘든 마음에 ‘그냥 죽으면 되지!’ 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웃고 있을 아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던 2019년에 친언니의 권유로 봄학기에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아토피가 심해서 10여 년간 집에서만 생활했고, 게다가 봄이 되면 더 심해지는 아토피 때문에 10분 거리의 대전 법당도 가는 게 망설여졌습니다. 갈까 말까 고민하다 힘들게 법당에 가서 수업받은 첫날, 아무도 제 얼굴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게 너무 좋았고 편안해서 용기 내서 정토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그때 법당에서 법문 듣고 돌아가는 길이 참 좋았습니다. 발걸음도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습니다.
천일결사 예비자 모임에서 법사님을 처음 뵙고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토피가 심해서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했는데 법사님은 아프면 약 먹으면 괜찮다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법사님의 말씀을 듣고 집에 오는데 마음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 괜찮지. 진짜 아무것도 아니네! 라고 마음먹으니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게 됐습니다.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병원에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피부 상태는 아니었지만 80% 정도는 회복하면서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해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선크림도 못 바르고 화장도 할 수 없지만, 다시 사람을 만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좋았습니다. 문경에서 했던 불교대학 졸업 수련회에서 300배를 한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하고 나니까 제가 무언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이 들면서 저 자신이 자랑스러웠고 마음도 가벼워졌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나니 깨달음의 장에도 갈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겨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빨리 가지는 못해도 천천히 꾸준하게 할 건 다했구나! 합니다. 아토피도 집에만 있었다면 여전히 저를 괴롭혔겠지만 기도하고 법문 듣고 도반들을 만나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 가볍게 지나갔습니다.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 가족들과 갈등을 생겼다는 도반들과는 다르게 남편은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법륜 스님의 고등학교 후배여서 거부 반응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제가 정토회를 다니면서 많이 웃고, 표정도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말에 소임을 하다 보니 일정이 많고 밤에 회의하는 경우가 잦아서 미안했습니다. 뭐라고 하지도 않는 남편의 눈치를 보고 위축되었습니다. 그러다 작년 1만 불교대학 모집을 할 때 남편에게 전법을 했습니다. 지금 남편은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마치고 일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깨달음의 장에도 다녀오고 봉사활동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바뀌어 이제는 제가 남편을 밀어줘야 하나 싶습니다.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바뀌기 전에 법당에서 수업이 끝나고 청소를 하는데 저는 화장실이 자주 걸렸습니다. 집에서도 하기 싫은 화장실 청소였는데 정토회에서는 밥을 먹어도 좋을 만큼 깨끗하게 치우고 돌아오면 제가 뭘 해냈다는 뿌듯함이 생겼습니다. 화장실 청소, 그 일이 제 봉사의 진짜 첫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로 불교대학 영상 봉사자를 했는데 쉬운 소임이었음에도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온라인으로 넘어가면서는 저보다 나이 많은 활동가에게 온라인에 대해서 알려주며 기쁨을 느끼고 화면의 뒷배경을 만드는 것에도 재미를 느꼈습니다.
제가 경전반 담당 소임을 맡은 지 얼마 안 돼 정토회가 온라인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화상 회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글 미트는 또 어떻게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변화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니 믿을 것은 도반들뿐이었습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모르는 것들을 하나하나 배우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갑자기 온 온라인의 과도기를 함께 지나다 보니 갈등이 일어날 틈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이걸 해도 되나?’ 할 정도로 버거웠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집에서 혼자 화상에 들어가 각도를 맞추고 연습했습니다. 1년을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니 아토피 때문에 몸이 가려운 것도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내가 나를 아끼자’ 했던 첫 기도문이 언제부터인가 부모님과 남편과 시어머니에 대한 감사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올라왔습니다.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이 없었더라면, 아픈 제 옆에 있어 준 남편이 없었더라면, 저는 여전히 집안에 콕 박혀 있었을 겁니다. 이제 저는 아무 문제 없다고,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기도합니다. 아직도 가끔은 피부가 안 좋아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올라올 때도 있지만, 아무 문제 없다고 얘기하면서 저를 아껴줍니다. 활짝 웃을 수 있고, 피부가 좋아지려면 불교대학에 가야겠다는 친구들의 농담이 반가운 지금의 제 모습에 만족합니다. 저는 지금 괜찮습니다.
인터뷰를 정리하다 보니 연신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송정미 님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습니다. 초파일 준비로 바쁜 중에도 바로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수락해 주었는데 아마 법당 소임도 이렇게 했을 거라는 상상이 됐습니다. 부모님에게 받았던 사랑을 봉사와 소임으로 되돌려주며 주변을 달콤하게 만들고 있는 송정미 님을 인터뷰할 수 있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글_채영지(서울제주지부 서초지회)
편집_홍윤미(인천경기서부 부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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