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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소박하게 살고 싶은 여리고 고집 센 착한 여자였습니다. 남편은 철저하게 가부장적이고, 화가 나면 안하무인이 되어 버럭 욕부터 하는 성격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락과 유흥을 좋아하고 매사에 겁 없고 통 큰 남자입니다. 가부장적인 남편과 소통이 잘되지 않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지만, 저만 참으면 가정이 평화롭고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10여 년 전 남편 사업이 어려워졌습니다. 남편은 방황하기 시작했고 생활비를 벌겠다면서 오락과 노름에 빠졌습니다. 처음에는 딴 돈으로 생활비를 조금씩 주더니, 점점 집과 멀어지면서 필요할 때만 손님처럼 다녀갔습니다. 그러다 대화도, 생활비도 끊어졌습니다. 방황하던 남편은 지인의 소개로 남양주에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하겠다며 집을 떠났습니다.
어느 날, 집주인이 이른 시일 내에 집을 비워 달라고 했습니다. 오래 살아도 좋다던 집주인의 돌변한 태도에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전세보증금에 압류가 설정되었다는 내용증명서가 날라왔습니다. 퇴근 후 저녁 시간과 일요일을 이용해 조건에 맞는 월세방을 찾아다녔습니다. 어느 친절한 부동산 사장의 도움으로 어렵게 방을 구해 이사하던 날, 남편 거래처 사장은 아침부터 서성이며 기다리다가 전세금을 받아 갔습니다.
남은 전 재산은 이천만 원. 아직 매서운 추위가 도는 2월 하순 월세방으로 이사했습니다. 날씨는 춥고 얼마나 서럽던지 짐 하나 정리하고 울고, 억울해서 또 울었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전세금까지 남의 손에 넘기고 떠난 남편이 참으로 밉고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책임을 회피한 남편을 원망할 겨를도 없이 생계를 책임져야 할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이제부터 이 집의 세대주는 나다. 두 딸은 내가 키운다!'라고 다짐하며 동사무소에 가서 세대주 변경 신청을 했습니다.
당시 독서지도교사를 했는데, 이것으로는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어 수업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삶의 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수산시장에 가 청소했습니다. 끝나고 집에 와서 아이들 학교 보내고 빵 가게로 달려갑니다. 빵 가게 일을 마치면 강남에서 가사 도우미를 하며 몸이 부서져라 일했습니다.
그리 바쁘게 힘들게 살면서도 이상하게 절에 가고 싶었습니다. 일요일에는 올케언니와 이 절 저 절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전의 내용도, 뜻도 모르는데 법문을 들으면 참회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불법을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집 앞 신호등 앞에서 '정토불교대학 모집'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불교대학이라는 것만 보고 정토회가 무슨 단체인지, 법륜스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곧바로 신청했습니다.
2014년 정토불교대학을 다닌 일 년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텅 비어 있던 영혼이 감동으로 가득 찼습니다. 뒤통수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듯이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그 무지함이 큰 죄가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하나가 살기 위해 왜 하나는 죽어야 할까?' 14살 어린 붓다가 생명존중과 차별에 대해 고뇌했다는 강의를 듣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석천 궁전의 무수한 구슬로 연결된 인드라망은 구슬 하나에 전부가 들어있고, 그 전부가 하나이며 모두가 연결되었다는 연기법은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가족밖에 몰랐던 좁은 시야에서 눈을 뜨고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된 진리를 배우면서 삶의 관점을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감았던 눈을 뜨니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습니다.
2015년 봄 경전대학 공부를 하면서 가을 불교대학 담당을 맡았습니다. 이후 자연스럽게 소임을 연장하여 21년 온라인 가을 불교대학까지 6년을 담당했습니다. 매해 인연 짓는 소중한 도반들과 함께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JTS 거리 모금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습니다. 토요일 오후 2시, 장승배기 전철역에 자리를 펼치면 부러울 것 없이 뿌듯했습니다. 잠시나마 가난한 지구촌 아이들의 엄마가 된 듯 행복했습니다.
어릴 때 제대로 못 먹고 못 입고 자란 제 모습이 떠올라 간절함이 더해져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고액 과외비를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은 경험하지 않고는 맛볼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거리모금을 하면서 드디어 아이들의 밥에서 벗어났습니다. ‘세상에는 굶어 죽는 아이들도 많은데, 우리 아이들은 잘 먹고 잘살고 있었구나!’ 자식이 한 끼 굶는 정도의 가난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니 예전과 비교해 많이 변했습니다. 톡 건들면 물컹하고 터져서 밤새 끙끙 앓았는데 이제는 꽤 단단해졌습니다. 어디서 큰소리가 나면 사시나무 떨듯 공포에 떨었습니다. 이것이 어릴 때 받은 상처 때문임을 알고 '나는 편안합니다'라는 명심문으로 정진하니, 신기하게도 편안해집니다. 남편의 업식도 이제는 이해합니다.
뚱뚱한 남편을 미워했는데, 하루 한 끼를 먹으니 폭식하게 되고, 그 어리석음을 이해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편함에 쌓이는 남편 명의의 독촉장 고지서를 보아도 이제는 분별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통장압류가 들어와서 일 년 동안 은행거래가 중지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많이 힘들구나!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고 이해하니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입니다.
"윤경례씨, 빨리 이혼서류 정리해! 애들하고 당신은 살아야지! 바보처럼 그렇게 당하고만 살 거야!" 하는 부장의 말에도 “고맙습니다” 답하며 씩 웃습니다. 남편의 장기간 부재를 수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으니 아무 문제 없습니다.
성에 차지 않는 큰딸을 인정하기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럴 때는 무조건 염주를 들고 엎드립니다. 바로 그때 힘들어하는 아이의 모습이 제대로 보입니다. 정진의 기쁜 맛을 보게 되니 매일매일 엎드려 한 배 한배 절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어리석고 여전히 고집부리며 움켜쥐고 꽁하기도 하지만, 지혜로운 수행자가 되어 잘 쓰이고자 21년 10월 보리수정진에 입재했습니다.
정토회관 방제실과 공양간 그리고 2층 카페에서 도반을 다시 만나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생기가 돕니다. 영양꾸러미 지원, 연탄배달 지원 등의 복지실천 활동과 천일결사 그룹장 또한 모두 저를 위한 봉사입니다. 크든 작든 봉사하는 기쁨과 보람으로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나로부터 시작된 이 작은 행복이 가족과 이웃을 넘어 세상 저 너머까지 멀리멀리 퍼져나가기를! 인생의 당당한 주인이 되어 세상에서 잘 쓰이는 수행자로 살아가고자 꾸준히 정진하겠습니다.
따뜻한 미소를 띤 윤경례 님 수행담을 들으니, 인간은 시련을 통해 성장하니 시련이 불행이 아닌 복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합니다. 불행이 복이 된다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다는 진리를 다시 기억하는 귀한 인터뷰였습니다.
글_윤경례
인터뷰 및 정리_이경분 희망리포터(서울제주지부 관악지회)
편집_도경화(대구경북지부 구미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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