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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자마자 남편은 만성 골수염 수술을 받았습니다. 회복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회복 후 출근했으나 곧바로 교통사고가 크게 났습니다. 무보험차량으로 음주 운전했던 남편은 중상을 입었고 사고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제가 감당해야 했습니다. 당시 4살, 11개월인 두 아들을 어린이집과 지인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는데 수업준비와 육아 그리고 가사까지 도맡아 했습니다.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남편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고 갈등과 다툼의 나날이었습니다.
남편은 폐기물재활용 개발업체에서 일했습니다. 불철주야 일하면서 월급은커녕 사비를 들여가며 일했습니다. 그러다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개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 수완이 없는 남편은 하는 사업마다 실패했습니다. 다시 시작할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번에는 되겠지’ 하는 기대로 한 푼 두 푼 모아 밀어주었지만 빈털터리가 되곤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 부부의 갈등은 이혼 직전까지 갔습니다.
아내와 엄마, 그리고 직장인으로 살면서 경제까지 책임져야 하는 무게감은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갈등은 이겨내기 힘든 괴로움이었습니다. 그 때 문득 기도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 시절 영남불교학생회 여름수련회에서 만난 법륜스님과 인연으로 순천에 가정법회가 있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가정법회에서 천일결사 기도 책을 구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이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절에 가서 혼자 시작한 기도는 다음 날부터 집에서 꾸준히 이어 갔습니다. 기도하고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이 열리고 환희심이 일어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경험이 힘이 되어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천일결사 기도는 그해 바로 불교대학 입학으로 이어지면서 가정법회와 강연봉사 지역책임 소임을 맡았습니다.
순천 법당 불사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참여하는 사람들조차 비협조적이라는 생각에 분별심이 났습니다. 어느 정도 법당이 모양새를 갖추어 가면서 도반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서로 의논하면서 준비했습니다. 개원식을 기다리는 마음은 신나고 마냥 좋았습니다.
법당을 개원하고 보니, 봉사자는 부족했고 할 만한 사람들도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홍보와 출가 열반 재일 정진을 저 혼자 했습니다. 여건이 되지 않아 봉사를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위한 정진에 소극적인 도반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떤 부분이 부족했는지 알았습니다. 총무로 눈 앞의 일이 무거웠던 저는 도반의 마음을 헤아리는 유연함이 부족했습니다. 일이 수행임을 경험하며 도반을 이해하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마음을 내니 도반들과 관계도 편해졌습니다. 특히 서로 경험하고 알아차린 것을 진솔하게 꺼내어 나누기하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나는 정말 열심히 했다. 맘껏 했으니 여한이 없다.'
법당을 채운 도반들을 보며 뿌듯했고 잘했다는 자만심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볍게 소임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수행은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통일 특별위원 소임을 맡고 나서도 마음은 법당과 정토회에 머물러있었습니다. 한직으로 밀려난 것 같은 서운함이 있었고 불러주면 언제라도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법당소사와 전세계 수행자랑 수행담을 쓰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나를 괴롭힐 때 ‘ 원을 가지고 활동한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했구나’ 알아차렸지만 괴로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법사님의 “ 모든 것을 내 문제로 볼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들여다볼수록 그 의미가 새겨지며 제가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그 말씀이 나침반이 되어 내 문제로 돌이 킬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방황하고 넘어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긴 시간이 지나 마음을 들여다보니,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변하고 있었고 정해진 운명은 없다는 부처님 가르침이 진리임을 경험했습니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았던 통일 특별위원 활동도 어느새 내 몸에 딱 맞는 옷이 되어 있었습니다. 내게 온 인연은 올 만하니 왔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 지지해준 남편은 원래부터 내 편이었습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수많은 인연에 감사하며 겸손한 수행자로 회향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손정현 님은 제 경전대학 담당이었습니다. 주간반이라 수업 전에 법당을 가면 언제나 사시 예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떤 힘이 저리도 간절하게 이끄는 것일까 생각하며 나도 저처럼 간절해질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스스로 입재를 했다는 말에 울컥하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6년 총무라면 6년 고행하신 부처님과 햇수는 같은데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물었더니 ‘내가 일으킨 먼지가 날아가 상대방에게 혹 가시가 되지 않았는지 마음이 살펴집니다.’ 하고 말하는데 '가시라니요? 꽃 중에 꽃입니다. ' 하며 서로 웃었습니다. 무엇을 해도 편안하고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삶, 나는 길가에 핀 한 포기 풀과 같다는 명심문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글_최서연 희망리포터(광주전라지부 동광주지회)
편집_임명자(광주전라지부 서광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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