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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유쾌하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어디 가나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 22살 때, 오래 아팠던 엄마의 병시중을 위해 하동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년 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부모님 말씀에 거역이라는 것을 몰랐던 저는 아버지가 선택한 집안의 남자와 선본 지 1주일 만에 결혼했습니다.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결혼하게 된 남편은 저와 성격이 참 달랐습니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면서 말이 많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조금 들떠 있는 성향에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저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사느니 못 사느니’ 하는 세월을 보내다 보니 아이가 생겼고, 10년쯤 지나 그럭저럭 살아질 때였습니다.
한 동네에서 친구로 지내던 사람에게 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큰 사기를 당했습니다. 원래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던 저는 사업을 한다던 친구가, 직원 월급을 줄 수 없을 만큼 형편이 어렵다는 이야기에 시댁, 친정 등 여기저기서 큰돈을 모아 빌려주었습니다. 만난 지 5년 정도 된 친구로 우리 회사에서 몇백 만원 어치 물건을 가져다 팔고, 대금도 틀림없이 보내면서 일도 잘해서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큰돈을 차용증 하나 받지 않고 빌려줬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가장 급했던 시댁 빚은 IMF로 퇴직한 남편 퇴직금으로 갚았습니다. 그 후 10년간은 매해 빚 갚을 계획을 세우고 그 빚을 탕감하며 살았습니다. 14살, 10살, 9살 아이들이 있었지만 아이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아들에게 장난감 하나 사주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큰 사고를 쳤으니 인간관계를 다 정리하고 남편 눈치를 보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더 잘났다고 생각했던 남편에게 아무 말 못하고 살았습니다. 남편은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도 술만 마시면 저를 원망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술주정을 아주 심하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랴 빚 갚으랴 정신없이 살던 저는 머리가 맑지 못하고 항상 멍했습니다.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듯 정신이 흐릿하고 날이 궂으면 그 증상은 더 심했습니다. 일하면서도 노래 가사를 옆에 써놓고 외워 부르며 그 암울한 세월을 견디기도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우울증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40대, 10년을 보내고 빚도 얼추 갚았지만 마음속 응어리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기죽어 힘들게 사는 인생이 너무 억울하다.’ 항상 이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또 빚을 다 갚아서인지 남편에게 숙이고 살던 마음이 슬슬 없어지고 옛 업장이 고개를 들어 남편에게 분별심도 많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쯤 남동생이 정토불교대학에 가자고 했습니다. 남이 뭘 하자고 하면 깊이 고민하지 않고 따라 하는 저는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동생이 만든 생활한복 회사에 5형제들이 모두 같이 일하고 있던지라 가족 5명이 함께 불교대학 입학했습니다. 누나인 저, 회사 사장인 남동생, 그 밑에 여동생, 막내 남동생, 회사에서 한복 디자인을 맡고 있던 저의 작은 딸까지요. 법당에서는 나중에 형제라는 것을 알고 이런 가족도 있구나 하면서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광명 법당 거리 모금이 자리를 잡아 갈 때쯤이었는데 5명이 참여하며 으쌰으쌰 재미나게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불교 대학에 입학하던 날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행복하게 살겠습니다.’라는 명심문이 참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수행하면서는 그 누구에게도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한 저의 힘든 이야기를 부처님을 상대로 다 풀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절을 하며 ‘오늘은 이런 일로 속상했다. 저 사람 때문에 힘들었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면 속이 시원해졌습니다. 부처님은 겉으로 활달한 성격이지만,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힘든지도 모르는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품이 한량없이 넓은 분이었습니다. 겉으로만 좋았던 서방자가 속으로도 점차 좋아지기 시작한 첫걸음이었습니다.
죽림정사에서 명상 중 ‘내 마음이 정말 가마솥 밑에 눌어붙어 새까맣게 탄 누룽지 같구나. 겉에 난 상처에는 약이라도 바르지만, 속의 상처에는 약도 바를 수 없구나.’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들며 그간 저의 괴로움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깨달음의 장〉1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지나간 세월의 억울함으로 내내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흘린 눈물 끝에는 늘 주눅이 들어, 자신 없이 살아왔던 세월을 뒤로하고 이제 무엇이라도 할 것 같은 자신감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감동적인 깨달음의 장에서 돌아와서도 남편에게 삼배는 못 했습니다. 여전히 저에게 남아있는 자존심이 남편에게 굽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수행 과제는 항상 남편입니다. 저에게 한 번도 맞장구를 쳐주지 않는 남편과 살자니 ‘말을 받아 주는 사람이 없구나.’라는 허전함에 늘 속상했고, 저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남편은 제가 친구에게 사기를 당한 후에는 사람 만나러 나가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천성이 놀기를 좋아하는 저는 코로나 발생 전만 해도 우쿨렐레에, 난타에, 줌바에, 평화재단 일까지 일주일 7일이 부족하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저와 남편의 불편함은 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내려놓는다고 해도 순간순간 톡톡 올라오는 업식은 끝이 없었습니다.
경전반을 졸업하고 막냇동생과 함께 가을불교대학 모둠장을 1년하고, 천일결사2 모둠장을 하다가 작년에는 경전반 교실꼭지를 맡았습니다. 처음에는 코로나를 예상 못 하고 담당을 맡았는데 막상 코로나가 터지니 컴퓨터를 켤 줄도 모르던 저는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게다가 정규 학생만 12명, 청강생 2명, 이동반 학생이라도 오면 20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의 나누기를 진행하는 것이 늘 숙제였습니다. 인원이 많으니 나누기에 깊이가 없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래도 모둠 과제를 할 때 우리 공장에서 학생들이 면포, 면 손수건, 방수 앞치마 등을 미싱으로 만들어 낸 것은 참으로 보람 있는 활동이었습니다.
작년 1년을 경전반 진행하며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가랑비에 옷 젖었는지 이제 동창들이 놀자 해도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며 들뜬 마음이 좀 가라앉은 저를 발견했습니다. 저에게는 참 큰 변화입니다. 또한 남편에게도 그 1년이 지날 즈음에는 저절로 마음이 한 단계 내려갔습니다. 제가 수행을 해서 남편이 착해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원래 그 자리에서 그렇게 있었는데 그것을 알아보는 저의 눈이 드디어 조금 생긴 것이었습니다.
항상 부모를 위해,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며 살던 것에서 벗어나 이제 정말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의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토록 많은, 묵은 쓰레기를 가슴에 품고 살았구나. 어리석게도 살았구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 마음이 쿵쾅쿵쾅하던 것이 사라진 지금의 평온함이 너무 좋습니다. 이대로 여기서 이렇게 수행하며 세상에 공덕을 돌리며 살고 싶습니다.
‘내 이야기가 뭐 쓸거리가 돼야 말이지’라며 걱정을 여러 번 하던 서방자 님, '이제 거의 잊어 버렸는데 이야기하니 생각나네' 하면서 속 이야기를 풀어내 준 주인공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람의 성격까지 변화시키는 불법의 큰 가르침을 다시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글_ 정진아 희망리포터(부천정토회 광명법당)
편집_ 이종명(전주정토회 전주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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