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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강좌 - 법성게(3)

<법성게>는 신라 고승 의상 조사께서 화엄경을 요약해서 쓰신 글로 7자로 된 30구절, 210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 중에서도 양이 가장 방대하고 내용이 깊다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에서 축약해서 그 진수를 뽑은 글입니다. <월간정토>는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스님의 법문으로 <법성게>를 연재합니다.

인연 따라 나타나는 법성

 


 

     

법륜스님 본지발행인

     

     

꿈에서 깨면 지혜를 얻는다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증지란 깨달음의 지혜를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관념을 벗어나야 알 수 있지, 관념의 울타리에 갇혀서는 알 수가 없어요.

 

  같이 공부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앉아서 졸다가 뱀 꿈을 꿉니다. “어어 뱀 봐라. , 저거 쫓아내야지.” 꿈꾸는 사람에게 뱀은 실재하고 있어요. 꿈에서 깨어나야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꿈속에 있을 때는 깨어 있는 사람과는 얘기가 안 됩니다. 깨고 나면 뱀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 깨지 않았을 때는 뱀이 분명히 있어요. 이것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렇습니다. 꿈이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부부가 싸울 때는 자기중심의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때는 분명히 옳고 그른 게 있습니다. 누에고치가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로 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자기가 일으킨 생각에 갇혀있습니다. 거기서 한 발짝도 못 나오죠. 잠을 깨야 꿈인 줄 아는 것처럼 우리는 이 생각의 사로잡힘에서 벗어나야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가르침을 듣고 마음의 문이 열린 사람들이 불렀던 그 기쁨의 노래가 있습니다.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심과 같이, 덮인 것을 벗겨내어 보여주심과 같이, 길 잃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심과 같이, 어두운 밤에 길 잃고 헤매는 자에게 등불을 밝혀주심과 같이, 저희에게 갖가지 방법으로 법의 진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단에 귀의합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재가자가 되고 출가자가 되기를 요청하는 노래가 되었어요.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오라 비구여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마음의 문이 열린다는 건 어제까지는 도둑이었거나 살인강도였거나 창녀, 똥꾼, 천민이나 상놈이었다 하더라도 깨달으면 마치 꿈을 꾸다가 잠 깬 사람과 같은 겁니다. 이것이 증지((證智), 어떤 논리나 주장이 아니라 깨달아서 아는 지혜입니다.

     

인연 따라 나투는 진리의 성품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진성(眞性)이란 참된 성품을 말합니다. 법성(法性)의 다른 표현이지요. 진리의 성품은 이처럼 깊고도 미묘해서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어집니다.

 

  진리는 깊고 그 작용이 지극히 묘해서 우리가 이해하는 차원에서는 상상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농사를 짓고는 그 수확을 남 주면서 기뻐하는 선지식이나, 능히 극락에 갈 수 있는데도 항상 지옥에 가 있는 지장보살 같은 분을 우리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원효 대사는 세상에서 온갖 추앙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 버리고 천대받던 뽕 따는 아낙네와 뱀 잡는 땅꾼들과 어울려서 춤추고 노래했어요. 한번 붓을 들었다 하면 <대승기신론소><금강삼매경론>같은 책을 저술하는 등 어떤 지식인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불법을 꿰뚫는 존경받는 학승이었음에도 그것을 내려놓고 길거리로 나가 모든 중생과 함께하여 승속의 모양에 구애받지 않고 불법을 전파했어요. 물이 특정한 자기 형태를 갖고 있지 않아 그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뀌듯이 원효 대사께서는 여러 모습으로 세상에 나투셨는데, 이것을 화작(化作)’이라 합니다.

     

  <천수경>죄라 하고 업이라 할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그것은 어리석은 마음 따라 일어난다(罪無自性從心起)’는 구절이 있습니다. 죄다 업이다 할 씨앗이 본래 없으며,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 따라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만약 이 어리석은 생각만 사라지면 죄업 또한 없어진다(心若滅時罪亦亡)는 것이죠.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불수자성(不守自性)’이란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약이다 독이다. 길다 짧다.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이런 본래의 성품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근본 불교에서 말하는 라 할 것이 없다(無我). ‘실체가 없다는 것과 같고 대승불교의 비어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밥그릇이고 저것은 국그릇이고, 또 저 먼 것은 찬그릇이라고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밥을 담으면 밥그릇, 국을 담으면 국그릇, 찬을 담으면 찬그릇이 됩니다. 이것이 법의 실상입니다.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隨緣成), 이 말은 아주 중요합니다.

  

보약으로 유명한 인삼도 본래는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닙니다. 그러나 인연 따라 약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독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처음은 약효를 나타냈다가도 나중에는 독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먼저 독성을 나타냈다가 나중에는 약효를 나타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 잠시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물거품 같고 허깨비 같으며, 아침이슬이나 번갯불 같고, 꿈같고 그림자와도 같습니다.

     

  주먹질을 예로 들면, 그 자체는 선한 행위도 아닙니다. 길을 가는데 강도가 여자한테 칼을 들이댔어요. 그때 마침 길 가던 사람이 재빨리 강도에게 주먹을 날려 여자를 구했어요. 그러면 용기 있는 사람이라 하여 시민상을 줍니다. 그런데 집에서 부인과 다투다가 주먹질을 했어요. 그러면 폭력범이 되지요. 주먹질이라는 행위 자체는 제법의 본질에서 보면 선도 악도 아니고 옳고 그른 행동이 아니지만, 현상계에서는 인연 따라 선악과 시비가 결정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자유로워집니다.

 

신발 신고 방안에 들어오는 것이 바른 행동인가 그렇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바르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바른 행동이죠. 미국에서는 신발 벗고 다니면 예의 없는 사람이 되고 인도에서는 사원에서는 양말까지 벗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어른한테 인사하려면 얼른 가서 양말을 신는데, 인도에서는 양말도 벗어야 합니다. 바닥이 흙투성이어도 신발과 양말을 벗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신발을 신어야지 신발을 아무 데나 벗으면 결례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 신고 양말 신는 행동 자체는 본래 옳고 그른 것이 없어요.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도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이 구절만 기억하셔도 여러분은 해탈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3()에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버려라고 쓰여 있고, 5()에는 무릇 모양 지어진 것은 다 허망한 것이고(法所有相 皆是虛妄)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모양 지어진 것이 본래 모양 없는 줄을 알 때,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라(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고 얘기합니다.

     

지난번에 어떤 보살님이 찾아왔어요. 얼굴도 예쁘고 교양 있고 강단도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옷도 잘 입고 야무지게 생긴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불경을 읽으면 참 재미있죠?” “, 어떻게 아셨어요?”

  보살님은 경전을 읽으면 부처님 말씀은 정말 맞아, 옳아 그러면서 재미있게 경전 읽는 걸 참 좋아할 것 같습니다했더니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살님은 참선도 잘하시겠는데하니까 아니, 스님, 어떻게 알았어요? 사실, 절에 오면 매일 이렇게 앉아서 참선이나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보살님은 앞으로 경전도 읽지 말고 참선도 하지 말고 절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놀라면서 절하는 것은 질색이며, 다리도 아프고, 절한다 해서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하기 싫다는 얘기를 해요. 그래서 이유를 설명했어요.

 

보살님께 절을 권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보살님은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옳다고 하는 신념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에요. 소위 똑똑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경전을 읽으면 그것 봐라, 부처님도 이렇게 말했잖아.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쳤는데 왜 가르침대로 산다 하는 불자들이 저 모양으로 살까?’ 하고 내 옳다는 그 신념이 경전을 읽으면서 점점 굳어집니다. 경전을 읽으면서 반성하는 게 아니라, 이제까지 남편이나 딴 사람하고 얘기할 때 내가 고집 세다, 자기주장이 강하다고 그랬는데 경전을 읽어 보니 그 가르침이 자기를 지지해 주는 것 같은 겁니다. ‘봐라 부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잖아?’ 해서 경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보살님이 참선을 좋아하는 것도 이 아상 때문이에요. 절하고 주력하는 그런 자질구레한 일이랑은 집어치우고 이 뭣고?’ 하면서 바로 참선하는 게 맘에 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살님이 하는 불교 공부가 문제 있다 하는 것은 이 경전을 읽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옳다는 그 생각을 강화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는 틀렸고 내가 옳다는 이 생각을 놓아 버리는 게 공()인데, 그걸 더 강하게 만들어주니까 수행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오늘부터 절하십시오. 절은 왜 하느냐? ‘, 제가 틀렸네요. 제가 잘못했네요.’ 하는 이 마음이 들면, 어떤 사람도 고개를 쳐들고 내가 잘했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몸은 마음 따라 움직이는데, 목에 힘준다는 것은 자기 잘났다는 말이고, 고개 떨구고 허리 굽히는 것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절하라고 하는 겁니다. 내 생각이 옳고 객관적이라고 하는 이 생각을 놓아야 합니다. 그 생각이 있으면 보살님 주위 사람들이 다 상처를 입어요. 두 번째는 자기 자신에게 피해가 와요. 왜냐? 나는 옳고 세상 사람이 그르니까 속이 타고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 때문에 화가 납니다. 그러니까 엎드려 절하시오. 절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마음 굽히는 게 목적이니까 무릎이 아프도록 절하셔야 합니다.”

     

공부란 뭡니까? 절하면 된다. 참선하면 된다. 이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경전을 인용하여, 또는 어떤 스님이 뭐라고 말했다 하는 것으로 자기주장을 내세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 수행이란 내 것이라 할 것과 내가 옳다고 할 근본적인 무엇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 무아집(無我執)을 말하죠. 그럴 때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마음이 편해지고 가슴 속에 맺혔던 응어리들이 하나씩 풀려요.

 

우리가 가슴 속에 왜 응어리를 가진 채 사느냐? 변하지 않는 어떤 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칼은 다른 칼에 부딪히면 상처가 생기지만 내가 허공이라면 외부의 어떤 칼이 꽂힌다 해도 상처 입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자기 비우는 작업이라 하는 겁니다. 법의 실상을 잘 알아서 지혜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얘기죠. 여기까지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살면서 언제나 이 구절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원효 대사께서 해골바가지의 물을 먹고 게송을 읊었는데, 그 게송은 새로 지은 게 아닙니다. 화엄경 내용이었어요. 대사께서도 화엄경을 많이 읽고 그 문장을 항상 새기고 있었지만 체험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것을 깨닫자마자 항상 담고 있던 그 구절이 저절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이런 구절을 새기고 있으면 일상생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탁 돌이켜지게 됩니다. 문장은 짧지만 여기까지가 총론에 해당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

 


법성게法性偈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일중일절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時無量劫)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相共化)
이사명연무분별 십불보현대인경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부사의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 이 글은 월간정토 2017년 7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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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댓글 1개
  •  토마토 2017/08/01 08:11
    허공은 어떤 칼에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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